나는 네커치프를 풀어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다음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앉았다. 가슴이 아팠지만 몸을 숙여 나일론 스타킹(10실링짜리였다) 왼쪽 무릎 바로 아래에 엄지손톱으로 구멍을 냈다. 제정신인 여자라면 절대 용인하지 않을 단정치 못함을 암시하는 완벽한 한 수였다. --- p.47
언니의 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건전했다. 언니는 학교 성적(늘 뛰어났다), 읽고 있는 책에 관한 생각(항상 긍정적이었다), 가족에 대한 감정(항상 애정이 넘쳤다)을 기록했다. 버로니카가 완전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더 음침하고 악의적인 마음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 p.94
자살은 우리 모두를 미스 마플로 만든다. 우리는 단서를 찾으려고 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과거에서 단서를 찾으려 한다. 문제의 인물에게 남은 건 과거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미 말했듯이 누구든 버로니카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p.99
절벽 위 좁은 길에서 누군가를 뒤따라갈 때 그 사람을 절벽 너머로 밀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 p.130
영국에서 무언가가 변하고 있다는 느낌, 문화가 전통 사상의 예속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급 시스템의 경직성이 줄어들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새로운 생각을 품은 북부 중등학교 출신 소년이 계급 상승을 이룰 때가 무르익었다. --- p.176
아무리 자수를 놓고 피아노를 쳐봐도 우리 대부분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조용한 절망일 뿐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 pp.188~189
[진정한 자아] 개념이야말로 우리를 정신 병원에 가두는 구속복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페르소나뿐이며,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둔 진정한 존재 상태로 돌아가려는 여정이야말로 바로 그가 설명하는 문제의 근원이다. 해방으로 가는 길은 우리가 여러 페르소나로 이뤄진 뭉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 p.268
나는 반복적인 일을 하거나 허공을 한참 멍하니 바라봐도 지루함을 전혀 느끼지 않는 능력이 있다. 열심히 살펴보면 항상 무슨 일이든 일어나고 있다. 주변에서 온통 작은 드라마들이 펼쳐진다. 그러나 버로니카 같은 지식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 생각하느라 너무 바빠서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 pp.291~292
「하지만 진짜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어서 뭐 하죠?」 내가 말했다. 「스스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게 무슨 소용이지?」 --- pp.313~314
삶의 기본 값은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무언가가 끼어들지 않는 한 삶은 마치 그 주인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처럼 계속된다. --- p.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