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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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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35*210*20mm
ISBN13 9788994820934
ISBN10 89948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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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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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나선 길이 어느새 네 언저리이고
설 자리 없는 네 곁을 바람으로 오가다
마주치면 넌 껍데기뿐인 걸
그래도 널 향한 마음이 늘 내게 있어 다가선다

넌 내게 뜨거운 사람
온전히 내게 스며들기를 고대하던 겨울 가고
내 입김으로 따습고 싶던 봄이 떠도는데
내 방황은 길고 깊게 골이 져서
네가 보듬기엔 버거운 딴 세상 이야기지
바람 이는 내 곁을 서성이는 네게
꽃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마음 갈피에 끼우고 점점 희미해지는
네 뒷모습을 떨치려 눈을 감는다
--- p.12 「내게 부는 바람」

안부인 듯 시 한 편이 공중에 뜨자
입안을 맴도는 인사 한마디
처음부터 답이 오리라 믿진 않았지만
때 없는 이명에 착각도 했지
세월 안길에 묻힌
밥 한번 먹자는 인사치레는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좋은 시절에 읊어주던 시 구절이
꽃바람에 날아다니는데
섣불리 건네 오던
가뭇한 날의 이야기는
속절없는 봄을 여러 번
어지럽게 보낸 후 이제야
아픔 아닌 추억인 게
참 다행이다
--- p.17 「참 다행이다」

유리병 안에 포로의 몸이 된 소라와 조개 껍데기들이
허물 고운 무늬로 한 여인의 삶을 은연중에 같이 가고 있다
궁상스럽게도
수십 년 동안 그들을 내쳐버리지 못하고
내 생활 언저리를 맴돌게 하고
내가 가는 길을 지켜보는 걸 왜 허락하는지
아릿한 내 생의 흐름이 그들에게 조차 부끄러운데

기억도 없는 어느 바닷가
그들을 주우며 누군가와 까르르 웃고 떠들고
모래밭에 흘렸을 나의 싱그러움과
그날의 기억은 간 곳 없고
파도에 밀리고 끌리며 닳고 닳아서
본래의 모양새와 아주 다른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들을 데려와
유리병 요정으로 가두고
우리의 희망이 함께 사위어 가는 초라한 시간을 보낸다

허덕이며 살아 온 내 생의 절반을 지켜본 그들을
차마, 함부로 내칠 수 없어 보듬고 있지만
이제는 이별할 때
짭조름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가 아니면 어떠리
가까운 강가 모래밭으로 정중히 너를 보내 주련다
수십 년 볼모로 잡고 내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해 보려 한 욕심
그 죄가 크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으므로
--- p.26 「소소한 이별 예정」

묵묵히 서 있는
저 미루나무 그림자가
담장 너머 기웃대던
그대였으면

지나가는 갈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반가움에 손 흔들던
그대였으면

초저녁 잠 설치는
소쩍새 저 부름이
휘파람 불어주던
그대였으면

무수히 뜬 저 별들이
초롱초롱 나 기다리는
그대 눈빛이었으면
참으로 좋으리
--- p.72 「그대였으면」

여름 방학 당번 날
타박타박 학교엘 가는데
말동무도 없는데 땀은 흐르고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먼지는 풀풀 나고
학교는 왜 그리 먼지

할 일도 별로 없는
당번 책임 다 하고 돌아오는 길은
한나절 훌쩍 넘은 시간
더위와 허기짐으로 축 늘어져
낮은 언덕 모퉁이를 돌아오는데
갈 때는 보지 못한 산딸기가
언덕 위에 널려 있다

눈이 번쩍 뜨여
허겁지겁 허기를 산딸기로 배를 채우고
기분 좋게 언덕을 뛰어 내려오다 그만 넘어져
종아리를 싹 밀었다
금방 딸기 빛 진한 피가 다리에 번진다
너무 아파 화가 나서 엉엉 울고 싶었지만
울음을 꾹 참고 다리를 끌며 집에 오니
엄마가 기겁을 하신다

혀에 감기던 달큰한 맛과
다리에 맺힌 핏방울이 생각나면
한창 나대다가도
아픔을 속으로 삭일 줄 알던
어렴풋이 철들기 시작한
열한 살의 여름
--- p.86 「열한 살의 여름은 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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