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김미나가 다가오길래 살짝 고개를 들고 눈치를 살피는데,
“야 토 나와, 얼굴 치워.”
하고 돼먹지 못한 말을 한다. 얼굴이 화끈했다. 나는 대체 왜 내가 분노보다 수치감을 먼저 느끼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 p.48
“원래 나를 깎아내리는 말을 듣는 건 힘들어. 정당하다고 해도 분통이 터지기 마련인데 이유도 없는 헛소리만 들어 왔으니 당연히 힘들지. 싸가지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야. 내가 다 화가 나네.”
백록담의 누나는 딸기차를 저으면서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가 되기도 전에 위로로 다가왔다.
“요즘 사람들은 얼마나 무례한지, 내가 타고난 내 것을 멋대로 입에 올려. 그러면서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게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도 몰라. 그게 얼마나 천박한 일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절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텐데 말이야.”
내용은 직설적이었으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전처럼 상냥해서 화를 참 고상하게 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86
“미인아, 너는 네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아야 해. 그래야 흔들리더라도 곧 제자리로 돌아와서 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거야. 꽉 찬 마음을 안고 묵묵하게 너의 길을 걷다 보면, 다른 사람도 너의 진면목을 알아볼 거야. 아, 박미인은 그런 점이 참 괜찮은 사람이더라, 하고 말이야.”
이 남매는 꼭 봄날에 나부끼는 꽃잎 같았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보듬어 주는 덕에 조금쯤 일어날 기운을 찾고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도와줄게. 우리 남편이 날 도와줬던 것처럼.”
그러니까 세상이 하는 거짓말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 세상의 기준과 상관없이 ‘너’라는 사람 자체가 예술이니까, 하고 언니가 말했다. --- p.147
김미나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것처럼 턱을 치켜들었다.
“너 똑바로 들어. 얼굴 예쁘게 태어난 건 감사할 일이지,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할 건 아니야. 그 얼굴로 어디 시집이나 가겠느냐고? 야, 너는 남자한테 시집가려고 세상 사니?”
“뭐 이 썅….”
“욕하지 마. 나도 욕 들으면 기분 나쁘고, 때리면 아프고, 갈구면 화나. 알았어?”
알았어? 하고 말을 끝내는 순간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쾌감이 느껴졌다. --- p.221-222
강렬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왠지 다시는 정하얀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지금이 마지막인 것만 같은 직감. 어쩌면 깨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그 애의 뒷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손 닿으면 흩어지는 환상 같은 분위기, 건드리면 터지는 비눗방울 같은 느낌이 정하얀의 뒷모습에서 풍기고 있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 애를 붙잡아야 했다. 죽어 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정하얀, 잠깐만!!!!!”
정하얀은 들리지 않는 양, 멈추지 않았다. 나는 무작정 그 애 앞으로 뛰어갔다. 물기가 아직 촉촉한, 빨갛게 실핏줄이 터진 그 애의 눈이 다시 나를 쏘아볼 때 나는 비로소 정하얀의 마음을 본 듯했다. 심해 속에 갇힌 것처럼 어둡고 눅눅한 그 애의 마음이 보였다. --- p.238
진동벨 번호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다시 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
주문을 외듯이 바로 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까만 플레어 스커트에 하늘색 브이넥 셔츠. 살짝 수그린 얼굴과 불퉁한 표정. 잔뜩 찡그린 인상이었음에도 감탄이 나오는 새하얀 미모. 그리고 그 옆에 선 멀끔한 남자애. 정하얀과 김한솔이었다. 김한솔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반가운 표정을 했다. 정하얀은 그런 김한솔의 손에 이끌려서 투덜거리며 카운터 가까이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정하얀을 봤을 때, 나는 한편으론 이 애가 못 견디게 가여웠었다. 그 때문에 카페에 놀러 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던 걸지도 모른다.
정하얀은 삐딱하게 눈을 치뜨고 반항적으로 카페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하얗고 예쁜 얼굴로.
왠지 왈칵 뜨거운 게 솟구쳤다. 코가 맹맹해졌다. 인사, 인사를 해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목구멍이 뜨겁고 코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가도 뻑뻑해지려는 순간,
“어서 오세요, 미인의 법칙입니다.”
뒤에서 백록담이 씩 웃으며 말했다.
--- p.255-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