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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부정의에 대한 저항과 불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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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들어가는 글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존 브라운 사망 후의 논평
존 브라운의 마지막 날들

저자 소개2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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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David Thoreau

1817년 7월 12일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 근교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1837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으나 학생을 처벌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고 형 존 소로 주니어와 함께 진보적인 학교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으나 형의 건강 악화로 오래 운영하지 못했다. 이후 일정한 직업 없이 부모의 가업 연필제조업을 돕거나 측량사, 목수, 가정교사 등으로 일하며 틈틈이 강연과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당시는 미국 건국 후 혼란기라 문화적 자산이 빈곤한 지식인들의 새로운 사조인 초월주의 태두 랠프 왈도 에머슨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고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1817년 7월 12일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 근교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1837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으나 학생을 처벌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고 형 존 소로 주니어와 함께 진보적인 학교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으나 형의 건강 악화로 오래 운영하지 못했다. 이후 일정한 직업 없이 부모의 가업 연필제조업을 돕거나 측량사, 목수, 가정교사 등으로 일하며 틈틈이 강연과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당시는 미국 건국 후 혼란기라 문화적 자산이 빈곤한 지식인들의 새로운 사조인 초월주의 태두 랠프 왈도 에머슨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고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해 인두세 납부를 거부해 투옥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쓴 『시민불복종』은 훗날 간디, 마틴 루터 킹 등의 비폭력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초월주의자로는 랠프 월도 에머슨을 비롯하여 헨리 데이비드 소로, 시인 윌리엄 엘러리 채닝, 월트 휘트먼 등이 손꼽힌다. 이는 소로의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의 가치를 인지하는 사상 체계의 기초가 되어 자연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소로는 또한 ‘나는 자연인’이라고 외친 사람들의 원조 장-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제안을 몸소 실험하게 된다. 이는 하버드 동창이며 초월파 문우였던 찰스 스턴스 휠러가 1841-1842년 콩코드의 플린트 호수 오두막에서 몇 달의 고적한 명상 치유의 시간을 보냈는데, 휠러의 은둔처를 다녀온 다음 소로는 새로운 체험을 자신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소로는 직접 오두막을 짓고 독립기념일에 입주했다. 그는 오두막에서 “한 주일에 하루는 일하고 엿새는 정신적인 삶에 정진하는 삶이 가능한지” 실험에 착수하여,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미국인들의 일상을 뒤집어 보려고 했다. 자연인의 삶을 궁금해하는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질문에 대답하는 형태로 소로는 1846년부터 『월든 숲속의 생활』을 집필했으며, 그의 오두막은 자연을 관찰하는 집필실이 되었다. 초월주의자 소로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대학 시절부터 그를 괴롭혀온 폐결핵으로 1862년의 45살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책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며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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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부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영문학과 영어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샬롯 브론테이다. 외고 졸업 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이화여대 영어교육 석사과정에 있다. 이화영어뮤지컬연구회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으며 국제통번역협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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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23*188*20mm
ISBN13
9791198612229

책 속으로

당시 노예제도를 옹호하지만 평화적인 저항을 고수한 다른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달리 존 브라운은 평화적인 저항은 효과가 없으며, 억압적인 노예제도를 말살하는 길은 오로지 폭력 혁명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그는 누구보다 종교적 신념이 강해, 자신을 노예를 소유하는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한 신의 분노를 대행하는 도구라고 믿었다.
---「들어가는 글」중에서

그는 이런 성공을 운이나 특별한 마법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 탈주자가 말하듯이 수적으로 우월한 장병들이 그 앞에서 겁에 질린 것은 대의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잘못된 것을 막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사람은 없습니다. 목숨의 끝자락에서 어리석은 행동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마지막 계획을 서둘렀고, 남들과 다른 길을 열었습니다.
--- p.33

많은 이들이 선한 기질을 타고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도와 관습에 얽매여 보다 높은 동기와 목표를 품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존 브라운처럼 할 수 없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고, 그가 미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 p.41

신문 기자들은 존 브라운이 본인 스스로 일을 부여한 것 자체가 광기의 증거 중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존 브라운은 잠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기자들은 오늘날 인간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신성한 임명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 양 말합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의 일상에 종교와 교리가 스며드는 것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대통령이나 정당이 임명하는 사람만이 노예제도를 없앨 수 있다는 듯 말합니다.
--- p.68

그의 시신이 이송되던 날, 나는 그제야 그가 교수형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으며 같은 이유로 슬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의 죽음 후 이틀이 지나서야 들린 소식이었으며,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아니 며칠이 지나도 그 소식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나와 동시대인이라 알려진 모든 이들 가운데 오로지 존 브라운만이 내게는 죽지 않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 p.110

출판사 리뷰

‘노예가 해방되는 그날까지’
존 브라운, 그는 극단주의자인가
아니면 노에 해방의 상징인가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 전쟁으로 요약되지만, 미국의 노예 해방에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이어지기까지 흑인 노예들의 자유를 위해 동조한 백인들도 있었다. 존 브라운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자 남북전쟁 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해방론자였다.

당시 노예제도를 옹호하지만 평화적인 저항을 고수한 다른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달리 존 브라운은 평화적인 저항은 효과가 없으며, 억압적인 노예제도를 말살하는 길은 오로지 폭력 혁명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누구보다 종교적 신념이 강해, 자신을 노예를 소유하는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한 신의 분노를 대행하는 도구라고 믿었다.

1859년 10월 16일, 그는 노예해방 운동을 널리 확산하기 위해 22명을 이끌고 버지니아주 하퍼스 페리의 연방 무기고를 급습했다. 이곳에서 장창과 소총 무기를 탈취해 노예들을 무장시켜 노예제도를 무너뜨리려 했다. 하지만 하퍼스 페리 습격은 36시간 만에 실패로 돌아가며 집단 노예 봉기를 일으키지 못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를 씻을 수 없다”
핍박받는 이들이 자유롭기를 갈망한 사람
그래서 무기를 들고 저항한 사람

과격한 노예 폐지론자 존 브라운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미국 전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신문들은 이 사건을 ‘봉기’나 ‘습격’이 아니라 ‘반란’, ‘반역’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살인과 반란 공모, 반역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1859년 12월 2일에 교수당했다.

존 브라운에 대한 평가는 당시는 물론 지금도 첨예하다. ‘노예 해방의 불씨’를 지핀 영웅이라는 평가와 에이브러햄 링컨조차 그를 “미치광이”라고 불렀을 만큼 극단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오갔다. 노예 해방이라는 대의는 더없이 숭고한 것이지만, 행동은 과격했다.

하지만 존 브라운은 타락한 세상에 누구보다 절망했고, 누구보다 핍박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이 핍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갈망했다. 그 꿈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실현하고자 했다. 노예제 철폐를 위한 ‘극단적인 모험’은 미국 남부와 북부 사이의 뿌리 깊은 골을 수면 위로 드러냈으며,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노예 해방의 불씨를 지폈고, 그의 꿈은 1년여 뒤 벌어진 남북전쟁을 거치며 실현되었다.

부정의에 대한 저항과 불복종을 외친 소로우
그가 뜨겁게 되살려낸 존 브라운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빅토르 위고는 ‘그의 처형은 조지 워싱턴이 스파르타쿠스를 죽이는 것과 같다’라고 빗대며 혁명으로 선 나라인 미국이 또 하나의 혁명가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고, 당시 그를 지지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그를 ‘옳지 못한 세상의 법에 항거해야 하는 명령’을 따른 살아 있는 양심으로 지칭했다.

소로우는 외진 호숫가에서 오두막집을 직접 짓고 홀로 산 경험을 엮은 《월든》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자급자족과 안빈낙도의 삶을 실천하면서도 불의 앞에서 주저하지 않은 사회운동가로, 이런 면모와 문제의식은 노예 해방과 부당한 정부에 대한 합법적인 개인의 저항을 주장한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에서 읽을 수 있다.

소로우는 존 브라운의 대의명분을 옹호했고, 여러 차례 그의 구명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존 브라운을 위해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노예제 폐지 운동에 헌신하며 정의를 위한 실천을 촉구했다.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바로잡아 주리라 기대해 미루지 않고 스스로 나서는 것. 그것이 소로우가 말한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이며, 존 브라운을 적극 옹호하고 그를 위해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을 쓴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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