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를 목표로, 건축가로서 일을 해도 대외적으로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건축가가 아니다”, “나 자신을 건축가라고 칭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다”라고 무심코 말하는 점이다. 직업생활에서 직업 정체성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은 그다지 행복한 일이 아니다.
건축과 그 외의 평범한 건물, 보존해야 할 건축과 부수어도 되는 낡은 건물, 보수가 싸더라도 해야 할 일과 고액의 보수에도 관여하고 싶지 않은 일, 게다가 건축가와 비非건축가를 구별한다. 건축가가 매일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실시하는 이러한 구별의 기준은 건축가들 사이에서 대체로 일치한다.
왜 ‘건축가의 해체’인가. 이는 한마디로 지금까지 당연시되어 온 건축가를 둘러싼 환경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기회를 얻어 작품을 만들고 그것이 잡지에 게재되는 등의 평판을 불러일으키면 한층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의 양을 점차 늘리면서 주택에서 상업 시설, 오피스 빌딩, 머지않아 미술관이나 청사 등의 큰 프로젝트의 의뢰가 날아든다는 것이 건축가의 성공 스토리였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스토리는 대부분 해체되었다. 이 책은 “건축가는 해체되었다”, “그래서 끝났다”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건축가들을 일단 해체한 후, 그로부터 새로운 건축가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 건축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지 않냐는 주장이다.
건축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길러온 디자인 센스, 심미안, 공간 파악력, 그리고 설계력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센스나 스킬은 건축가계 안에서(만) 기능하는 자본이다. 따라서 건축가계가 붕괴되면 건축가가 쌓아온 아비투스나 자본의 일부는 자본이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건축가계에는 자격이나 제도 같은 ‘성벽’이 없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나 아티스트 등 타계의 주민들은 항상 건축가계의 영토를 침범하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건축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계의 멤버, 즉 건축가는 개개인이 그 장벽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서 건축가계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건축가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를 목청껏 외치는 것이다. 육성이든 글이든 트윗이든 상관없지만 피아의 차이를 내세움으로써 건축가계의 장벽을 세우는 것이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에 비하면 전문직으로서 건축가의 입지는 불안정하고 약하다. 그 이유는 의사나 변호사처럼 국가 자격과 직능이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사라는 국가 자격은 건축 기술자, 공무원, 관리, 교사, 목수에 이르기까지 건축에 종사하는 많은 직업인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축가만의 직능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 면허나 변호사 자격처럼 직능을 보장해주는 국가자격은 건축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라는 직능의 존재 의의나 그 가치가 단절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전달해야 한다.
젊은 층의 자본은 ‘선행 세대를 부정하는 로직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과격할수록 주목도는 높아진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위험한 행위이기도 하다.
후기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고, 업데이트함으로써 미지의 내일을 대비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인에게도 해당된다. 구마가 구현하고 있는 건축가의 모습이란 후기 근대에 잘 적응한 건축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는 반성과 전진의 과정 속에서 이상과 현실의 모순에 살을 깎아내는 자신의 고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이해하기 쉬운 말로 언어화 시킨다. 이는 활자가 되어 대중에게 노출되고, 그렇게 구마 겐고라는 건축가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을 낳고, 구마 겐고라는 브랜드를 강화 시킨다.
아비투스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도록 만든다. 가치관이나 미의식에 맞지 않는 것은 혐오하고 배제한다. 건축가는 자신이 직접 만든 건물을 ‘건축’이라며, 일반 ‘건물’과 분리하고 특권화해왔다. 그 외에는 논의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로 줄곧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건축가가 혐오하고 배제해 온 것들 중에도 건축가의 직능이 요구되는 장면이 늘고 있다. 즉 향후 건축가의 직능은 그들이 거들떠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건물’과 관련된 일에 속하는 것이다.
오히려 건축가의 아비투스는 자유롭게 직능을 펼쳐나가는 데에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남아도는 빈집이나 빈 점포를 앞에 두고 “이건 건축이다”, “그건 건물이다”라며 이 둘을 분별해도 소용없다. 또한 건축가의 직능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나머지 건축가와 비非건축가를 나누어 인식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다양한 직능을 가진 많은 플레이어와 유연하게 협동하는 장면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의 설계 및 감리에 특화된 일을 건축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건축의 설계 뿐만 아닌 시공이나 건축의 기획 및 이벤트의 홍보나 운영을 포함한 ‘건축과 관련된 모든 직능의 총체’를 건축가라고 부르는 시대가 온 걸지도 모른다.
그러한 플레이어와 2인 3각으로 장소를 만드는 사람을 이 책에서는 거리의 건축가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지역에 뿌리를 둔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들은 작품이 잡지에 게재되는 것도, 건축가로서 유명해지는 것도 그다지 바라지 않는다. 즉 건축가계에서의 탁월화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때때로 클라이언트와 함께 시공하거나 기획을 생각하면서 스스로가 플레이어로서 쉐어하우스나 코워킹 스페이스를 운영하는 등 장소 만들기에 참가한다. 클라이언트의 기쁨과 거리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직접적인 반응은 작품의 게재나 유명성의 획득이라는 보수를 능가하는 일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