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에게는 최악의 날이 나에게는 일상이 된 지금, 나 또한 내가 맡았던 환자들처럼 때로 불행해지고, 앞으로 약해질 것이며, 최악의 시간을 거쳐 언젠가 반드시 죽음에 이르리라는 것을 안다. 삶이 유한하다는, 이 지극히 당연하고 간단한 사실을 배우기 위해 아둔하기 이를 데 없는 나는 여러 번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아야 했다.
--- p.12
M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한 번에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환자의 초기 상태와 우리가 취한 조치, 투여한 약물, 그리고 생체 징후를 포함한 환자의 현재 상태에 대해 브리핑했다. 하지만 마루에 고인 피를 밟을 때 났던 찰박찰박하는 소리와 바닥에서 올라오던 쇳가루 비슷한 피 냄새는 브리핑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금은 드레싱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현장에서 환자의 벗겨진 얼굴 가죽을 보았을 때 우리가 받았던 충격 역시 그 브리핑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로써 눈을 감아도 여전히 보이는 보글거리는 피거품을 포함하여, ‘환자 케어와는 별 상관 없고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 눈과 귀와 마음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 pp.25~26
C가 출동한 현장에는 코카인에 취한 산모와 그녀가 임신 7개월 차에 낳은 조산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산모는 의식을 잃었지만 숨은 쉬고 있었고, 아기는 숨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C는 이제 막 태어난 조산아를 살리기 위해 그의 작디작은 가슴을 눌러야 했다. 방바닥은 주삿바늘로 가득해서 숨을 쉬지 않는 아기를 잠시 내려놓을 곳조차 없었다고 했다. 아기는 결국 사망했고 엄마는 살아남았다. … 그리고 그는 이 일을 계기로 파라메딕을 그만두었다. 돌발 상황에 늘 잘 대처했고 어지간해서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며 자잘한 실수조차 저지르지 않던 C였지만, 아무도 떠나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 p.57
총알이 뚫고 지나간 것은 환자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상황을 똑똑히, 심지어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지령실 직원 N의 마음까지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 낮과 밤을 알 수 없도록 완벽히 햇빛을 차단한 렌프루 카운티의 911 지령실은 늘 어둡고, 기계를 보호하기 위해 켜놓은 에어컨 때문에 항상 서늘하다. N은 그 어둡고 서늘한 음지 한 귀퉁이, 여러 개의 모니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다음에 걸려 올 911 신고 전화를 기다렸다.
--- pp.82~85
사람이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듯 자살 시도 역시 처음이 힘들 뿐,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다음 시도까지 걸리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십상이다. (…) 무언가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 나는 일어서서 환자를 내려다봤고 환자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명백한 방역 규칙 위반인데 나는 안면 가리개 안으로 손을 넣어 마스크를 내려서 내 얼굴을 보여줬다. “안녕?” “…안녕.”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너를 좋아하는 사람 분명히 많이 있어. 그러니까 너도 살아.”
--- p.132
그 현장에서 나와 파트너 J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환자가 아니라 배고픔이었다. 빵 한 조각 씹을 수 없을 만큼 바빴던 우리는 식탁 위에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에 자꾸만 눈이 갔다. 환자를 병원까지 이송하고 나서 J는 잘 차려진 파티 음식이 너무 먹음직스러워서 남는 게 있으면 좀 싸줄 수 있을지 물어볼까 ‘생각만’ 했다고 고백하듯 말했는데, 솔직히 나도 그때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그 음식을 훔쳐 먹었어도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을 거라는 나의 말에, J는 베이스로 돌아오는 앰뷸런스 안에서 한참을 웃었다. 우리가 함께 웃었던 그 짧은 시간이 그날 밤 유일하게 크리스마스다운 시간이었다.
--- p.145
얇은 의료용 장갑을 뚫고 손등으로 전해진 환자의 온기에 나도 모르게 환자의 손을 포개어 맞잡고 말았는데, 그때 환자가 나지막이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나도 괜찮아질 거고, 너도 괜찮아질 거야….” 캐나다 시골 마을 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앰뷸런스, 그 안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와 굳은 표정의 한국인 이민자 출신 응급구조사가 말없이 서로의 손을 맞잡는 낯선 그림이 그려졌는데, 결국 먼저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은 내 쪽이었다.
--- p.189
우리가 매일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들과 스쳐 지나가듯 나누는 사소한 일상일 뿐인데, 신기하게도 삶의 끝에 다다르면 그런 사소한 일상은 죽기 전 마쳐야 하는 신성한 의식이 되고 만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서로를 안은 품에서 올라오는 살냄새를, 대화에서 전해지는 안온함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더 절실히 간구하는 것은 그것이 숨을 거두기 전에 거쳐야 하는 순서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사소한 일상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행복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고, 행복했던 기억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한 건 없기 때문일 것이다.
--- p.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