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 세이야 세희야?”
“세희. 근데 독일 사람들이 발음을 잘 못해. 내 이름의 철자를 읽으면 제에- 이렇게 발음하더라고. 미국에선 아무 문제가 없었거든. 다들 내 이름 읽으면 원래 발음대로 비슷하게 하는데 독일 사람들은 잘 못하더라고. 매번 설명해 줘야해서 스트레스야.”
“난 세이 맘에 들어. 라캉이 생각나는군. 말하는 주체. 넌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 웃지만 말고.”
들키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그는 왜 저렇게 잘 아는 건지.
“생각만 하지 말고 나한테 말을 하라고. 너 글자론 꽤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내 앞에선 전혀라고 만치 말을 안 하잖아.”
아직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말야.
--- pp.18-19 「Kapital 1」 중에서
[우린 끝이야]
어린 왕자가 슬퍼서 노을만 마흔네 번 봤다던 그날처럼 난 슈만을 죽도록 들었다. 하루 종일 책을 읽다 홉스가 쓴 정갈하고 침착한 우울이란 단어를 읽자 갑자기 머리가 멍했다. 밖에 나갔다. 도저히 침착해질 수 없었다. 다리 위에 버려진 맥주병 하나를 발로 찼다. 고꾸라지며 방향을 잃고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맥주병. 내 꼬락서니와 다를 것 없었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걷고 있는 우이천 건너편으로 내가 좋아한 후드 코트를 입고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서 건너편에 천천히 걸어 가는 크리스가 보였다.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은 그의 장례식에 가는 것과 같다고 하던데 사실이었다. 누군가를 마음 속에서 죽인다고 해도 그 속에 각인된 존재는 불시에 되살아나 날 헤집어 놓겠지. 내 마음이 멋대로 그를 만 킬로미터 넘는 이곳에 끌고 온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환상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사라지지 마, 제발.
--- p.89 「Kapital 2」 중에서
“나에게 예술은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이야. 누구 맘에 들겠다고 쓰여지는 글자가 아니라 스스로 계속 팽창하고 세계를 만들다 완성되는 소설 같은 거. 난 보편적이라고 포장하면서 다수의 입맛을 겨냥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뻔뻔한 작품보다 진짜 자기 자신을 보여 주는 과정을 보는 게 흥미로워. 그런 작품은 형식을 막론하고 뭐든 가치 있지 않나 해. 난 지금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중을 위해서 준비만 하다 죽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는 거야. 정치적인 행동을 하든 영화 작업을 도와 주든지 큰 틀에서 보면 내 모든 행동의 이유는 그거야.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부모가, 사회가, 다른 누가 원하는 걸 하는 게 아니고.”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 놓은 그의 집과 같은 공간 속에 혼자 잠겨 있다가 갑자기 튀어 오르며 전개 되는 생각들. 나와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인격의 핵심이라 부를 수 있는 자아를 지켜보는 일은 즐거웠다. 그는 자기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을 유지하며 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게 남들이 볼 때 너덜너덜하고 정신없어 보일지언정.
--- pp.131-132 「Kapital 3」 중에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자켓에 손을 넣었다. 내 자켓엔 주머니가 없었다. 그가 주머니 속의 내 손을 잡고 뚜벅뚜벅 걸었다. 네온사인이 없는 베를린의 어두운 밤이 좋은 것은 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개를 빳빳이 처들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큼 차가운 빛을 내뿜는 별의 무리를 찾아 밤하늘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눈이 소복하게 내린 밤, 유리처럼 사각거리는 눈을 밟으며 우리는 함께 걸었다. 넋 놓고 바라보고 싶을 만큼 네 눈을 좋아했는데, 그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난 늘 눈을 감게 되더라고. 왜인지 눈을 뜨고 네 얼굴을 보면서 키스하면 부끄러우니까. 꿈이 지나간 자리처럼 빛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그래. 넌 언제나 내 꿈 한가운데에 있었어. 처음 단둘이 만난 날, 너의 집 언덕을 오를 때, 정말 내가 네 어깨에 손을 댈 수 있을까 믿기지 않아 설레기만 했었는데 너는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 pp.205-206 「Kapital 4」 중에서
“걔 진심이 뭘까. 진심.”
그런 거 물으면 더 모르겠더라고. 진짜 좋아했다고, 그래서 열심히 사랑했다고 말하면 나는 기필코 그 마음을 다시 의심하고 말았다. 정말 그럴까,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고. 진심이란 단어는 날 위로하기 위한 단어일 뿐이지 남에게 강요할 성질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번번이 궁금했다. 단 두 글자에 내재된 무한의 세계. 모두가 필사적으로 밀봉하고서 절대로 보여주지 않으려고 고집스럽게 닫고 있는 내면의 심상. 얼마나 그걸 드러내기 싫으면 잠수까지 하는 사람도 있겠나 싶지만, 나는 감히 똑바로 쳐다볼 용기도 없으면서 계속 눈길이 가는 상대를 힐끔힐끔 그러나 주야장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하나만을 바랐다.
--- p.222 「Kapital 5」 중에서
몸은 이미 거의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데 눈물과 감정은 굳지 않았나 보다. 순간, 늙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이나마 현실을 본 것 같았다. 왜 할머니는 내가 매일 찾아옴에도 매일 새롭게 버림받은 것처럼 절망하시는 걸까. 죽어가는 순간과 삶은 절대로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잠들기까지 기다리면서 나는 창가 너머 묽은 노란 빛을 띠고 나뭇가지에 대롱대는 잎사귀들을 바라보았다.
전엔 몰랐는데 낙엽은 가지에 매달리는 힘이 빠져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더라고, 인간이 잎사귀 같은 존재인 줄 난 몰랐어.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끝까지 마지막 잎새를 그려 주는 고결한 화가는 이 세상에 없다. 통장이든 지식이든 자식이든 차가운 병실에서 마지막을 버티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닿지 못하니까.
--- p.267 「Kapital 6」 중에서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어.”
“그런가. 하나도 안 변한 건가. 그렇다면 우리 지금 무슨 사이지.”
“글쎄. 친구? ”
“난 사랑하는 여자랑 친구 따윈 못 해.”
내가 그를 반만 알았어도 지금 이 말에 분명히 가슴이 뛰었을 텐데. 그런 단호함을 사랑했으니까.
“그거 알아? 난 널 만나서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어. 널 볼 때마다 내 감정은 통제가 안 돼.”
“그게 너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고. 탓하지 마. 넌 도대체 왜 그렇게 불안정한 거지?”
--- p.321 「Kapital 7」 중에서
“몰라, 어쩌면 내가 미친 건지도. 난 너랑 진지해지고 싶거든.”
“제정신이야? 난 곧 베를린에 가야 돼. 파리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너랑 내가 서로 뭘 안다고 지금 이런 관계를 논해?”
“알아가면 되는 거지. 감정이 그렇게 됐는데 이유가 중요해?”
나는 관계 시작 전에 늘 나왔던,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을 똑같이 내뱉어야 했다. 파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몹시 어색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과 길거리에서 키스를 하는 커플로 넘쳐나는 이 도시에서 내 마음은 오히려 더 차가웠다. 이렇게 낭만적인 파리에서 내가 생전 만나 본 적 없는 돈 많고 지적인 사람을 찾아내어 설령 사랑을 하게 되었다 해도 결과는 다 똑같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느끼는 오르가즘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적인 상상력과 여유로 넘치는 그와 보내는 시간도 즐거웠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에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마당에 이 이상 파리를 더 좋아하게 되거나 무리해서 이곳에서 사는 것을 갈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멀리서든 가까이서 보든 언제나 색다른 느낌을 주는 에펠탑 같은 남자일 수도 있겠지만 그와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기에 그는 내 기준에서 너무 완벽했는지도 모른다.
--- p.367 「Kapital 8」 중에서
서로 화가 나서 물고 뜯지 못해서 안달인 때도 있었는데 그것조차도 감정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정이 있고 없고가 만드는 마음의 풍경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증오도 애정이 만드는 부산물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쓴 피천득의 문장에 담긴 뜻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던 밤.
호텔에서 먹는 조식, 건조한 빵을 씹어 대며 맞은 아침. 피곤에 절은 모습을 감추고 싶어 화장을 두껍게 했다. 무미건조하게 이어지는 대화, 의례적인 반응. 빨리 밖으로 나가 버리고 싶어서 나는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정해진 체크아웃 시간보다 삼십 분 이른 시간에 나와 버린 우리들. 함께 지하철을 기다리던 그 순간, 그가 마지막까지 말했다.
“사랑해.”
한번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는데 익숙했다. 며칠, 몇 달, 몇 년이 걸려도 결국 답을 찾아냈다고. 그 말은 평생 산더미 같은 책을 들여다보아도 절대로 풀 수 없을 것 같은 의문이었다.
--- pp.402-403 「Kapital 9」 중에서
Woher kommt die Katze? Ich finde, sie kommt aus nirgendwo.
이 고양이는 어디 출신이지? 한국산도 독일산도 아닌 것 같아.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 난 독일에도 한국에도 어느 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 내가 아무리 독일에서 한국산 딱지를 붙이고 다녀도 한국에선 수입품 취급 당해도 상관없어. 아무 곳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고. 결정된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건 여전히 내게 힘들었다. 소녀도 여자도 엄마도 되고 싶지 않은 나, 경계를 즐기는 나. 그런 내가 단 한 가지 간절하게 되고 싶었던 것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그게 되고 싶어서 오늘도 글을 읽고 쓰고 투쟁하는 것뿐이야. 그게 될지 말지 어제도 오늘도 불확실한 건 마찬가지고.
--- p.451 「Kapital 1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