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가 그려 보이는 원미동은 작고도 큰 세계이다. 그 세계는 소설 속에서는 부천시 원미동이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그 장소에 살고 있는 몇몇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작은 삶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양귀자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세계는 커다란 세계이다. 그것은 원미동의 세계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원미동은 “멀고 아름다운 동네”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양귀자의 역설적 표현을 빌리면 “가나안에서 무릉도원까지”의 아득한 거리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기어이 또 하나의 희망”을 만들어가며 살아야 할 우리들의 동네이다. 그러므로 원미동은 작고도 큰 세계이다.
홍정선(문학평론가)
『원미동 사람들』에는 성장과 소외, 풍족과 빈곤, 폭압과 자유에의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갈등하며 공존했던 80년대의 소시민적 삶의 풍속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원미동’의 세계가 문제적인 것은 단순히 한 시대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삶의 진실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원미동’은 멀리 있지만 아름다운 혹은 멀리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희망의 공간적 이름이다.
황도경(문학평론가)
그동안 비평가들은 양귀자 선생의 소설을 이해하는 단어로 ‘슬픔’을 꼽았습니다. 슬픔 어린 눈으로 가족과 이웃 나아가 세계를 아우른다는 것이죠. 그 따뜻한 슬픔이 원미동 거리를 차가운 네프스키 거리와 다르게 만드는 힘일 겁니다. 저는 양귀자 선생의 ‘슬픔’ 앞에 ‘단단한’이란 수식어를 두고 싶습니다. 『원미동 사람들』에는 격이 다른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가난한 것, 배우지 못한 것, 치욕적인 상처를 받은 것, 이런 것들을 복원시키는 양선생의 손길은 참 섬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살아난 지지리도 못난 삶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도 주지 못합니다. 독자들이 원미동 사람들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 작은 인간들이 수많은 절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틀어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탁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