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우리에게 ‘시점’을 강요한 맥락들이 무너지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한 연인을 둘러쌌던 역사의 응시도, 한 시인의 삶을 가둔 매끈하고 불투명한 현실도 무너져 내린다. 단지 그곳에는 ‘안’과 ‘바깥’이 투명하게 보이는 유리병들이 세워질 뿐이다. 이제 팬데믹이 조금은 잦아들고, 모두가 폐허 위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게 되는 시기다. 오늘 소개한 영화 〈운디네〉는 그런 우리에게 ‘베를린 바깥의 목소리로 베를린을 다시 세워 나가는 법’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도시의 디자인은 그것이 담아낼 수 없는 어떤 기능들까지 고려할 때 좀 더 완벽해질 수 있다. 현실은 그것이 다 담아낼 수 없는 ‘사랑’의 양상을 끌어안을 수 있을 때에야 온전히 유지될 수 있다. 옛 연인에 대한 애도를 마친 운디네와 크리스토프는 투명한 내면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언어들을 보여주며, ‘아직 말해질 수 없는 무언가’가 이 도시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재료임을 알려준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유리병 같은 환상 속을 오간 뒤에야 우리는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새로운 건축 스타일을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p.21, 「병속에 담긴 말들-영화 〈운디네〉」중에서
영화의 중심 서사는 제이콥의 것이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제이콥의 시선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가 한 사람의 완결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기억을 하나로 응축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대부분 3인칭 시점에 머물고, 데이빗의 시점으로 관찰하는 듯한 장면(주로 어른들의 대화를 문지방 너머로 보는 것처럼 표현된다)도 간혹 있지만, 그 시선은 부분적으로 앤과 모니카와 폴과 그밖에 다른 사람의 시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관객의 시선도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다. 이 영화가 80년대, 그리고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본 속에서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제이콥처럼 자신의 검고 축축한 흙을 찾아 거기 잠시 머물고 있을 것이고, 정이삭 감독 역시 ‘영화’를 자신의 토양으로 생각하며 거기에 ‘시간’이라는 컨테이너를 정박시켜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멈춰 있는 동안 컨테이너 한구석에서 몇 개의 비어 있는 기억의 상자를 열어 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낯선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와 감독의 ‘꽉 찬’ 시간을 지탱해온 그 텅 빈 시간의 블록들에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었는지, 그것을 확인하는 게 이 영화를 보는 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p.33, 「여름의 젠가-영화 〈미나리〉」중에서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복지 서비스와 그들을 위해 사용되는 예산의 범위가 지나치게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제한적인 이동권과 직업 선택권, 사회적 냉소 등으로 인해 고립된 장애인의 현실을 그저 통계 수치나 신문 기사 등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5등급’이라는 장애 등급이 주인공 강재기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했던 것처럼, 장애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복지 제도는 그들의 삶의 고통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저소득 계층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많은 이해와 해석의 방식이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일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많은 지점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사회 제도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눈을 뜨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신체적 장애를 갖지 않은 한 사람이 불운한 사고를 통해 일상 바깥으로 내몰렸을 때에야 겨우 바라보게 된 지점이며, 사회의 법과 제도가 자신의 역량 부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서 은폐하고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Awoke’라는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우리에게 과거형 동사가 아니라 명령형 동사 ‘Awake’로 다가와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통계와 수치 앞에서 눈 감으며 사회적 비극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 해서는 안 된다.
--- p.64, 「‘장소’와 ‘공간’ 사이에서 눈 뜨다-영화 〈복지식당〉」중에서
90년대적인 것들이 우리 대중문화에 다시 찾아오고 있는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과거의 장만옥은 우리에게 다가와 ‘너의 영화는 무엇이었니’라고 묻고 있다. 그것에 성급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다. 이 질문에 포함된 과거의 향수를 즐기기도 하고, 또 실패를 곱씹어보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욕망이 새롭게 피어날지 기다려보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대답을 들려준다고 해도 장만옥은 우리가 명명한 2023년의 바깥으로 잠시 물러났다가 또다시 우리가 현재에 갇혔을 때 수수께끼의 방식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만옥은 지금, ‘절반만 말해진 미래’를 들고 우리 앞에 서 있다.
--- p.111, 「‘장만옥’이라는 수수께끼-영화 〈이마 베프〉」중에서
우리는 지금 아버지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는 어느 순간에, 그는 내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중략) 우리에게 가격이 매겨지는 동안, 그리고 우리가 디지털 신호로 인코딩되는 동안 아버지는 우리 꿈속으로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 혹은 설명되는 것에 저항하는 감정들을 닮아 있기도 하다. 아버지의 오두막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진짜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 그와 싸워야 할 수도 있고, 그에게 굴복해 우리의 현실을 모조리 갖다 바쳐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는 여태껏 들려주지 않았던 간절한 음성으로, 편지라는 시대착오적이고 어색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해줄 수 없겠지만, 적어도 가상에 중독된 우리의 몸속에도 ‘뜨거운 피’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SNS와 포털 사이트, 유튜브의 텅 빈 정보에 중독되어 삶의 전부가 시뮬레이팅 될 것 같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 p.133~134, 「아버지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영화 〈컴 투 대디: 30년만의 재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