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진 갈색 조랑말이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두 소녀가 젊음과 삶에 대한 소박하고 값진 이야기를 즐겁게 주고받으며 뒤따랐다.
앤은 행복 그 자체를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
“아, 에덴동산에서나 있을 수 있는 날이야. 그렇지 않니, 다이애나? 공기 속에는 마법이 들어 있어. 추수를 앞둔 저 자줏빛 골짜기를 봐, 다이애나. 그리고 죽어가는 전나무의 냄새를 맡아봐! 에벤 라이트 아저씨가 울타리 기둥을 자르고 있는 저 작은 골짜기에서 나는 냄새야. 이런 날에 살아 있다는 건 축복이야. 죽어가는 전나무의 냄새는 천국의 냄새야. 앞구절은 워즈워스의 말이고 나머지 뒷구절은 앤 셜리가 지어낸 말이야. 천국에는 죽어가는 전나무가 없을 것 같아, 그렇지? 하지만 천국의 숲 속을 거닐면서 죽은 전나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천국은 완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아마 천국에서는 죽음 없이도 그런 냄새가 날지도 몰라. 그래, 그럴 거야. 저 향기로운 냄새는 전나무의 영혼이 분명해. 물론 천국에서는 그냥 영혼이겠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정말로 흥미로운 일이야. 제인은 단조로운 일이라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매일 언제나 즐거운 일이 생기고 아이들은 재미있는 말을 하니까. 제인은 아이들이 우스꽝스러운 발표를 할 때마다 벌을 준대. 아마도 그래서 단조롭다고 느끼는 걸 거야. 오늘 오후에는 꼬마 지미 앤드루스가 ‘반점’이라는 단어를 쓰려고 했는데 쓰지 못했어. “쓰지는 못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아요.”라고 하더라. 무슨 뜻이냐고 내가 묻자 “세인트 클레어 돈넬의 얼굴이에요, 선생님.”이라고 했어. 세인트 클레어는 정말로 주근깨가 많거든.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나도 한때 주근깨가 많았고 그 당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세인트 클레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애가 지미를 때린 건, 지미가 그 애를 ‘세인트 클레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거든. 세인트 클레어가 지미를 때렸다는 사실을 정식으로 들은 건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척하려고 해.
어제는 로티 라이트에게 덧셈을 가르치고 있었어. “한 손에 사탕이 3개 있고 다른 손에는 2개 있다면 사탕이 전부 합쳐서 몇 개지?”라고 물었어. “한입 가득요.”이라고 로티는 답했지. 그리고 자연 시간에 아이들한테 두꺼비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물었더니 벤지 슬론이 진지하게 대답했어. “두꺼비를 죽이면 다음 날 비가 오기 때문이에요.”
스텔라, 웃음을 참는 게 너무 힘들어. 집에 올 때까지 즐거움을 아껴두어야만 해.
---〈이상과 현실〉
앤이 자작나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햇빛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영혼이 꽃 같다고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어.”
프리실라가 말했다.
“그럼 네 영혼은 황금색 수선화일 거고, 다이애나는 붉디붉은 장미, 제인은 분홍색의 건강하고 달콤한 사과꽃일 거야.”
“네 영혼은 속에 보라색 줄무늬가 들어간 하얀 제비꽃일 거야.”
프리실라가 끝맺었다.
제인은 다이애나에게 저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속삭였다.
소녀들은 잔잔한 황금빛 저녁노을이 질 때 집으로 돌아왔다. 바구니에는 헤스터의 정원에서 딴 수선화가 가득했다. 앤은 다음 날 그중 일부를 헤스터의 무덤으로 가져가 놓아두었다. 울새가 전나무에서 음유시인처럼 지저귀고 습지에서 개구리들이 노래했다. 작은 언덕 사이에 있는 웅덩이마다 노랑색과 에메랄드빛이 넘실댔다.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구나.”
다이애나가 처음에는 기대하지 못했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즐거운 하루였어.”
---〈즐거운 소풍〉
언젠가 앤은 마릴라에게 말했다.
“가장 즐거운 날은 굉장하거나 근사하거나 신나는 일이 생기는 날이 아니라 목걸이를 만들 듯이 소박하고 작은 즐거움들이 하나하나 조용히 이어지는 날이라고 생각해요.”
초록 지붕 집에는 행복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앤의 모험과 불행한 사건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꺼번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과 꿈, 웃음, 배움으로 가득한 조용하고 즐거운 나날들 가운데 흩어져 나타났다. 8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오전에 앤과 다이애나는 들뜬 쌍둥이를 데리고 연못으로 뱃놀이를 하러 갔다. 모래 기슭까지 가서 ‘진들피’를 따고 바람이 태곳적부터 부르던 옛 서정시를 하프에 맞춰 노래하듯 살랑거리는 물결 속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행복한 하루〉
다이애나가 조용히 말했다.
“라벤더 아주머니의 부모님은 아주머니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준 것 같아. 엘리자베스나 넬리, 뮤리얼 같은 이름을 붙여줬어도 아주머니는 라벤더라고 불렸을 거야. 그 이름은 달콤하고 고풍스럽고 ‘비단옷’ 같은 느낌이잖아. 아, 하지만 내 이름은 빵이나 버터, 기운 조각보, 허드렛일 같은 맛이야.”
다이애나가 말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에게 앤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위엄 있고 여왕 같은 느낌인 걸. 하지만 난 네 이름이 케런해푸치라 해도 좋아했을 거야. 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서 이름이 멋질 수도 있고 추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지금 난 조시나 거티란 이름을 도저히 견딜 수 없지만 파이네 자매들을 알기 전까지는 무척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거든.”
앤이 신나서 말했다.
“멋진 생각이야. 처음부터 예쁘지 않은 이름이라도 예쁜 이름이 되도록 살아가야 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즐거운 기억을 남겨서 이름 자체로만 기억되지 않도록 말이야. 고마워, 다이애나.”
---〈상냥한 라벤더〉
앤은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고 처음으로 길버트의 시선에 흔들려 창백한 얼굴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지금까지 마음속 깊은 곳에 드리워져 있던 베일이 걷히고 뜻밖의 감정과 진실이 드러난 것 같았다. 어쩌면 낭만적인 사랑은 백마 탄 기사님처럼 화려하고 요란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오래된 친구처럼 조용하게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랑은 예상치 못했을 때 빛처럼 나타나 시와 음악이 있는 책장을 넘겨 버려 평범한 산문처럼 나타날지도 모른다. 마치 초록색 꽃망울이 황금빛을 띠는 장미꽃으로 바뀌는 것처럼.
그러고는 다시 막이 내렸다. 하지만 어두운 오솔길을 내려가는 앤은 더 이상 전날 명랑하게 마차를 타고 그곳을 내려갔던 앤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소녀 시절의 이야기가 담긴 책장을 넘겼고 이제 앤 앞에는 매력과 신비함 아픔과 기쁨으로 가득한 여인 시절이 펼쳐졌다.
---〈돌집에서 열린 결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