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래전에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에 끌려 그 일부분을 발췌,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번역 출간한 로버트 버턴의 The Anatomy of Melancholy를 개정 출간하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다. 처음 초판이 나온 것이 2004년이니 정확하게 그간 2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내가 공들여 번역한 이 책이 그간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번역자로서는 신기할 뿐이다. 은근히 기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역시 좋은 책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죽지 않는가 보다.
개정판에서는 내용 면에서는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초판에서 발견된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았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책의 제목과 표지 디자인을 새롭게 바꾸었다.
원제의 “Melancholy”를 구판에서는 “우울증”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번에 “멜랑콜리”로 바꾸게 되었다. 제목을 변경하기까지에는 다소 망설임이 있었으나,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버턴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멜랑콜리”는 단순히 우리가 현재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정신질환의 일종인 “우울증”보다는 인간의 모든 정신적, 심리적, 심지어 사회적 문제점을 광범위하게 포괄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정 번역판을 내며」중에서
『우울증의 해부(The Anatomy of Melancholy)』는 지금부터 약 400여 년 전 영국의 한 괴짜 학자 로버트 버턴이 쓴 괴상한 글이다. 그 내용 가운데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 가볍게 웃어넘길 부분, 말도 안 되는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대단히 흥미롭고, 진실되며, 유익하다. 모든 가치 있는 고전 작품이 그러하듯 이 책도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새롭고 현대적이며, 또한 우리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라면 ‘우울증’이라는 일종의 정신적 질환의 원인과 증상, 종류, 그리고 그 치료법을 설명하고 있는 일종의 의학서다. 그러나 역자가 이 책에서 ‘우울증’으로 번역한 ‘멜랑콜리’는 그 범위가 훨씬 확대되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우울증을 포함하여 우리 인간의 모든 비정상적인 심리상태-초월함, 두려움, 시기심, 사랑, 신앙심, 의심-등 모든 정신적 질환을 포함한다. 이 ‘멜랑콜리’라는 이름의 병은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지적 또는 정신적인 일에 종사하는 당시의 지식인들(시인, 목사, 학자 등)에게는 으레 따라다니는 아주 흔한, 친근한, 사치스러운, 그리고 사랑받는(?) 일종의 고질병인 동시에 하나의 사치스러운 유행병과도 같은 것으로서, 이 멜랑콜리에 대한 언급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비롯하여 당대의 많은 문인들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된다. (중략)
이 책에서 저자의 태도는 때로는 아주 과학적이고 때로는 아주 미신적이며, 때로는 의학적인가 하면 때로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때로 진지하고 때로는 코믹하며, 때로는 회의적이고 때로는 천진난만하며, 종교를 비난하는 말도 서슴없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근본은 아주 종교적이다. 책의 구성은 자주 주제를 벗어나 지엽적으로 흐르지만 그래도 짜임새가 있으며, 내용은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관찰과 버턴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 잘 혼합되어 있다. 책의 제목과는 달리 실제에서 이 책은 문학적인 상상력과 표현으로 가득 찬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우울증’은 그가 세상만사를 내다보는 창이다.
---「초판의 역자 서문」중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겠으나 어리석은 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약간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바보치고 이 우울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유스러운 사람은 없다. 그들의 습관과 기질에서 이 우울증의 증상을 엿볼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가 말하였듯이, “나쁜 성질은 고치지 않으면 결국 습관으로 굳어지며, 나쁜 습관은 결국 병이 되고 만다.” 이 문제에 대하여 철학자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리석음은 하나의 질병이다. 하나의 정신적인 질병이다.” 그렇다면 병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가 병이라면, 병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욕심, 정욕, 분노, 질투심, 불만, 공포심, 슬픔 등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는가? 이런 병으로 고통받고 있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되는가? 없다. 누구나 하나같이 정신병자다. 광증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같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 p.43~44
일종의 준비 단계로서 이 정도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을 해부하였으니 나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앞서 제안한 우울증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우선 이 우울증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하여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그 명칭과 차이점을 논하고자 한다. 우선 이 우울증(melancholy)은 그리스어 ‘melancholia’에서 왔는데, 이는 ‘검다’는 뜻의 ‘melania’와 앞서 설명한 ‘담즙(choler)’의 합성어이다. 즉 ‘검은색으로 변한 담즙’이란 뜻이다. 명칭은 그렇다 치고 이것이 과연 하나의 병인지, 아니면 병의 원인인지 또는 그 결과인지, 또는 그저 단순히 하나의 어떤 증상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여기서 단정 지어 말하지 않겠다. 우울증에도 그 종류와 증상, 그 정도의 심각성 등이 너무나 다양하여 간단히 정의 내리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p.112
우울증이 다른 원인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할 일이 없어 너무 한가한 데서 왔다거나, 스스로 판단해보아도 자기가 너무 고독함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은 혼자 산책을 즐기면서 자기만의 즐거운 상상 속에 빠지는 일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가슴속에 들어 있는 적이요, 소위 달콤한 우울증이라는 것으로서 허울만 좋은 친구 같은 것으로서 알고 보면 악마요, 향기로운 독약이며, 그 사람을 중증의 우울증으로 몰고 가 결국은 그 사람을 아예 망쳐놓는다. 그런 사람은 당장 어떤 일감을 찾아 떠나거나, 일을 시작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야만 한다. 이 사람이 나의 충고를 무시하고 계속 혼자 있기를 고집하고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혼자 달콤한 환상을 즐기면서 산책을 계속한다면, 촛불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방이 결국은 촛불에 몸을 태워 죽게 되듯이, 이 사람도 몸과 마음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