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Hadrianus) 장벽은 방벽이라기보다는 브리타니아 북부에 대한 로마의 통제를 강화하고 안정화시키는 척추 역할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관점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장벽 동서 길이의 중간쯤에, 그리고 1마일 정도 후방에 위치했던 빈돌란다(Vindolanda) 요새와 같은 곳을 그리 나쁘지 않은 배치지로서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에 발굴된 놀랄 만한 로마 유적에 의해 장벽 요새에 주둔했던 군인들과 주위 주민들이 영위했던 삶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25년에 걸쳐 23피트(약 7미터)의 깊이로, 그리고 유의미한 현장 확인이 가능할 정도의 폭으로 유적지를 분할했다. 그들의 목적은 고대 세계의 횡단면과도 같은 그곳을 옆 방향으로 훑어가면서 그 흙덩어리 속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과거 빈돌란다에 살던 남자들과 여자들이 자신들의 일상적 삶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종이처럼 얇은 엽서 크기의 목서판(木書板)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 p.47, 「제1장 세상의 끝에서?」중에서
크누트가 그러했듯이 에드워드는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을 모조리 동원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노르웨이 왕을 안전지대 밖에 묶어두기 위해 머시아와 노섬브리아 백작들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웨식스(Wessex) 백작 고드윈을 볼 때마다 형의 죽음이 떠올라 고통스러웠지만 그럼에도 고드윈의 도움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따라서 고드윈이 자신의 딸 에디스(Edith)와 결혼하라는 제안을 하자 그는 이를 거부할 수 없었고, 그녀는 그의 공식적인 왕비가 되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으며, 후일 이를 두고 에드워드가 순결 서약을 했다거나, 성행위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들이 생겨났다. 잉글랜드 왕위 상속자가 될 자신의 손자를 탄생시킴으로써 본인의 가계를 왕위계승 라인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고드윈의 야망을 좌절시키기 위해 에드워드가 일부러 에디스와 거리를 두었다는 이야기도 거론된다.
--- p.99~100, 「제2장 노르만 정복」중에서
마틸다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앙주의 조프루아 사이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황실의 격식을 (그리고 황후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계속해서 고집했으며,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조프루아는 기사도의 꽃으로 길러졌고, 프랑스어로 말했으며, 열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이 후계자를 생산하는 필수 조건은 아니었던지 마틸다는 1133년 아들을 출산해서 남편에게 안겼다. 아이의 이름은 그녀의 부친과 첫 번째 남편의 이름(하인리히)을 따서 헨리라고 지었다. …… 어머니로부터는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 같은 용기와 사나운 성정을, 아버지로부터는 날카로운 정치적 지성을 물려받았음이 확연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를 대면했던 사람들이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의 자질, 즉 제어하기 힘든 에너지만큼은 그 자신의 것이었다.
--- p.158, 「제3장 해방된 주권?」중에서
1282년, 웨일스 북부의 귀네드 왕국에서는 ‘스노도니아의 영주들’에 의해 작성된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만약 자신들의 군주가 [잉글랜드]의 왕에게 종주권을 넘긴다 하더라도, 스노도니아 사람들은 언어, 관습, 법률이 다른 그 어떤 외국인에 대해서도 충성 맹세를 거부할 것임을 단언한다’는 내용이었다. 1320년 스코틀랜드 아브로스(Arbroath)에서는 스코틀랜드의 대영주들과 백작들이 그들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가 단 100명만이 살아남더라도, 결단코 그 어떤 조건하에서도 잉글랜드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런가 하면, 그보다 2년 전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 왕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장을 보냈다. ‘잉글랜드인들의 끊임없는 배신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고, 또한 이 가혹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노예 상태의 멍에를 떨쳐버리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본래적인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 아일랜드의 군주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 p.213, 「제4장 외래인과 원주민」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결정은 엄청난 계산 착오였다. 셀커크(Selkirk)에서 소집된 스코틀랜드 군대는 지난 두 세대 동안 어떤 실제적 전투에 투입된 경험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이제 나이가 거의 60세에 이르렀고 길고 숱이 많은 백발의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흘러내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키가 크고, 뼈대가 굵었으며, 자세 또한 곧아서, 아직도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전쟁 군주의 위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전술들은 목표가 명확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단순히 박살의 대상일 뿐이었다. …… 그것은 운 없게도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상대로 실로 끔찍한 규모의 대량 학살을 자행하려는 것이었으며, 이는 또한 만약 저항한다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를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교훈이 될 것이었다. 사흘 동안 지속된 대량 학살의 결과로 수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 최소한 1만 1000명이 희생되었다. 한 연대기 작가는 비통해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유혈의 양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그것으로 제분소의 방아를 돌릴 수 있을 정도였다.’ …… 그 모든 파괴 작전에 소요된 시간은 불과 3주가 채 되지 못했으며, 이제 스코틀랜드의 자유는 에드워드에 의해 거의 질식된 상태가 된 것 같았다.
--- p.261, 「제4장 외래인과 원주민」중에서
1348년 여름, 이 불결하고 부산한 공동체에서 고정된 삶을 살던 사람들은 벼룩이 무는 것을 제때에 알아채지 못했고, 그것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그 지독한 서혜선종(鼠蹊腺腫)이 나타난 다음이었다. 매일 수백 명이 죽어나가면서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는데, 저항력이 가장 약한 어린아이, 노인, 그리고 빈곤층이 가장 먼저 희생되었다. …… 가족들은 ─ 중세 잉글랜드에 관해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들은 양친과 자녀들로 이루어진 핵가족이었다 ─ 건강한 식구들이 병든 식구들을 놓고 떠나야만 하는 가슴 에이는 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픈 자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던 부모들은 아직까지 감염되지 않은 나머지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 어떤 자책감이 들더라도 그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웨스트민스터의 한 수도사는 ‘그 시절에는 슬픔 없는 죽음, 애정 없는 결혼, 가난 없는 결핍, 그리고 탈출구 없는 도피가 있었다’라고 썼다. 그때까지 당연시되던 모든 것이 갑자기 질문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빵 굽는 이도 없고, 대부분의 집 노변에서도 빵을 굽지 않는데, 어디에서 빵을 구할 수 있을까? 아무도 일하는 이가 없는데, 어디 가서 약초를 구할 수 있을까? 사체의 부패물이 접촉성 전염을 유발하고 있는데, 누가 시체들을 치울 것인가?
--- p.294~295, 「제5장 죽음의 왕」중에서
잉글랜드, 웨일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농촌 사회에는 중대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경제적 힘의 균형이 극적으로 바뀌고 있었고,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영주가 아닌 민중의 편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판햄의 장원 관리인은 ─ 후일 그 자신도 흑사병으로 죽게 되는데 ─ 추수 비용이 흑사병 이전의 두 배에 해당하는 1에이커당 12펜스가 들어간다고 불평했다. 노동자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그에 반비례하여 임금이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판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국이 같은 양상이었다. 흑사병이 과연 이러한 농촌 대변혁의 원인이었는지, 혹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진행되어 오던 일련의 과정을 완성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것일 뿐이었는지를 떠나서, 중세 말기 브리튼의 농촌 지역은 불가역적으로 변화된 세계였다. 한 가지만 말하자면, 그 세계에는 더 이상 농노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비자유농에게 무임금으로 노동을 강제하는 일은 어려워졌다. 과거 그들은 땅과 집을 점유할 수 있도록 허용된 법적 권리의 대가로, 영주를 위해 건초를 운반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지만, 이제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확실하게 생존자들의 편에 선 상황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무급 노동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제 농부들은 영주나 관리인이 어떤 일을 해달라고 하면 임금을 지불해 줄 것을 요구하거나, 더 나아가 종전보다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 p.301~302, 「제5장 죽음의 왕」중에서
1526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앤을 향한 헨리의 구애는 자못 진지해졌다. 그가 왕비 앞에서 그녀와 춤을 추니 두 여성 사이의 대비는 뚜렷해졌다. 앤은 모든 면에서 아라곤의 캐서린과는 달랐다. 캐서린보다 최소한 10년이 젊은 그녀는 경건한 캐서린과 달리 쾌활함이 넘쳤으며, 상대를 깍듯이 존중하는 스페인식 풍속이 아니라, 기백이 넘치고, 심지어는 상대를 놀리기도 하는 프랑스식 예법에 익숙한 여자였다. 앤은 헨리에게 성적 즐거움과 가정적인 행복,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후계를 이을 아들 출산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제 헨리는 죽은 형의 아내를 취한 자신의 결혼 생활에 신의 저주가 내렸으며, 지난 17년간 자신이 근친상간의 관계 속에 있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 p.372~373, 「제6장 불타는 종교적 신념들」중에서
엘리자베스는 언니가 저지른 실수, 즉 배우자의 야망과 종교로 인해 그와의 결혼이 잉글랜드의 이익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손상시킨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서둘러 혼인을 함으로써 재앙을 자초하기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올바른 상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왕이 그렇게 한가롭게 선택의 시간을 갖는 것을 사치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특히 국무대신 세실의 입장에서 보면 여왕의 결혼만큼 더 긴급한 사안은 없었다.
--- p.435, 「제7장 여왕의 신체」중에서
그녀의 치세는 열매를 맺었다. 플랑드르에서 일어난 재앙은 잉글랜드 입장에서 볼 때 자본과 숙련 기술자들의 국내 유입을 불러온 선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안트베르펜(Antwerp)을 모방하여 잉글랜드에 처음으로 증권거래소를 개설했다. 잉글랜드 경제는 조금은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괄목할 만한 산업의 팽창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주석과 철에서부터 리넨, 레이스, 유리, 비누, 그리고 소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제품이 잉글랜드 안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주택들도 유리 달린 창을 다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고, 식탁용 식기류와 조리 도구에서도 백랍이 나무 재료를 대체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매우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풍요의 뿔(cornucopia)’은 모든 사람에게 그 과실을 풍족하게 나눠주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인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잉글랜드 인구는 500만 명에 달했다. (스코틀랜드는 50만이었다.) 흑사병 이후 최대의 인구 증가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먹여 살릴 인구는 늘어났는데 일자리는 부족했고, 임금 협상력은 떨어져서 노동자들은 전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수익이 높은 목축을 하기 위해 공유지에 대한 인클로저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수많은 촌락에서 백성들의 자급자족적 생계의 가능성을 봉쇄함으로써, 많은 이가 토지 없는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이리저리 떠도는 수많은 부랑 빈민의 대열에 합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 p.469, 「제7장 여왕의 신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