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문학의 주된 과제 중 하나인 ‘좋은 의사 만들기’에서 자주 언급하는 사항 중 하나는 인간으로서의 환자에 대한 이해이다. 치료의 대상이 되는 질병의 연장선상에서 환자를 바라보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환자 그 자체를 직시하고 이해함으로써 환자와 의사 사이의 소통과 신뢰 구축에 힘써야 한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물론 이는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구현되기 힘든 일이다. 의사도 환자를 치료 대상 이전에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전인적인 관점에서 환자를 이해하면서 의료에 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지만, 환자 역시 의사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의료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효과적인 의료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환자-의사의 소통은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며, 가장 이상적인 의료는 환자와 의사의 소통 하에 상호 협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 p.37
한의학의 역사는 곧 한반도에서 나타난 질병과 치유의 역사이다. 또한 그러한 질병과 치유가 가능하도록 했던 의학이론, 지식, 자원의 연결망을 시간 순서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곧 한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과 의학이 그 역사를 공유하듯이 한국의 질병사와 의학사, 즉 한의학의 역사 또한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과 맞물려있다. 한의학의 역사는 크게 한반도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경험의학이 전통의학의 위치에 있던 시기, 동아시아에서의 교류가 확산하면서 중국 의학과의 접촉으로 한의학의 모습을 갖추어간 시기, 그리고 그 이후 서구 문물의 도래 속에서 변형과 적응을 겪게 되는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여기서 ‘한의학’이란, 주로 한반도에서 전해 내려온, 특정한 이론과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질병을 치유해 온 의학적 지식과 기술, 실천의 총체라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단순히 의사가 환자를 어떤 의학지식을 이용해서 치료하는가 뿐만 아니라 환자의 입장에서 아픔을 느끼는 행위와 스스로 그 아픔을 다스리려는 실천 방식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방식으로 한의학을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한반도에서 전해 내려온 의료 행위들을 보다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p.98
오늘날 널리 알려진 학문으로서의 ‘생명윤리(Bioethics)’라는 용어는 미국의 생화학자이자 종양학자였던 반 렌셀러 포터(Van Rensselaer Potter, 1911-2001)가 1971년 출판한 저서 『생명윤리: 미래로의 가교(Bioethics: Bridge to the Future)』를 통해서였다. 그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윤리가 생태학의 실제적 이해와 나뉠 수 없다는 것이 이제 우리가 마주해야만 하는 사실이며, 윤리적 가치가 생물학적 사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이에 그는 인간의 생존이 생물학적 지식에 근거한 윤리에 의존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생명윤리(Bioethics)를 ‘생존의 과학(The science of survival)’이라 칭하고, 생명윤리를 통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 그리고 생물학적 세계에 대한 실제적 지식으로부터 사회적 선(good)을 위한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 지식을 산출함으로써 생물권의 보존을 목적으로 하고자 학제적 연구를 기도했다. 새로운 학문 영역으로서의 생명윤리에 대한 포터의 이러한 주장은 식물, 동물, 인간, 자연환경 사이의 관계인 생태학(Ecology)의 기초를 생물학으로 이해한 데 말미암으며, 이런 점에서 그가 제시했던 생명윤리는 지금의 환경윤리 내지는 생태학적 윤리(생태윤리)에 근접해있다.
--- p.142
2005년 생명윤리법이 처음 발효되었을 때만해도, 배아와 유전자 연구에 대한 규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 전반과 인체유래물 연구에 대한 규율까지 범위가 확장되었다. 생명에 대한 연구를 생명윤리의 측면에서 규제하고 제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칫 생명연구 자체에 대한 과도한 통제로 흐를 위험성도 제기되었다. 한편으로는 환자나 피험자의 자율성을 강조하여, 명시적 동의가 있는 경우에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경제적이나 정신적으로 취약한 피험자의 경우에는 동의라는 절차만으로 윤리적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많다. 실제 의료적 상황에서는 의사의 진찰, 시술, 처방 등 모든 의료적 행위들이 의학적 판단과 양심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상업적 이익이나 명성에 대한 집착에 따라 이루어질 가능성도 문제가 될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생명의료윤리와 의료윤리적 문제가 발생한 구체적 사례들을 중심으로 우리 개인과 사회가 갖추어야 할 태도에 대해 성찰해 보기로 한다.
--- p.169
출산과 관련된 의학적 발전과 변화는 동아시아 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손을 잇는 전종접대(傳宗接代)가 중요했던 만큼, 동아시아의 전통의학은 여성의 건강, 특히 임신과 출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각종 부인과(婦科) 의학서적이 출판되었다. 각종 권위있는 부인과 저서들을 출판하고 순조로운 출산에 대한 텍스트를 생산했던 것은 남성 의학자나 의료인이었으나, 이들은 유교사회의 젠더질서 아래에서 정작 출산 현장에는 개입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남성 의사 대신 출산 현장을 지휘하고 돕는 역할은 산파(産婆)들이 맡았다. 산파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고 문맹인 자들이 많았으며, 근대 이후 조산사나 산과의사에게 차츰 밀려나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산파는 여성의 출산을 보조하는 ‘의료인’으로서, 출산의례를 주관하는 ‘의례주관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고,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p.186
죽음은 철학의 오래된 주제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죽음에 대한 의철학적 이해를 시도한다. 삶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것만큼 죽음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면, 우선 사상적으로 죽음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필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이 무엇인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후에도 계속되는 삶이 있는지 등을 말이다.
죽음은 생명뿐 아니라 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한다. 누구나 언젠가 맞이해야 하는 삶의 종착역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개별 인간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실존적 사건이다. 죽음은 일반적 사건이면서도 개별적인 고유한 사건이다. 나의 죽음은 물론이지만 ‘너’의 죽음이라는 혹은 ‘그’의 죽음이라는 2인칭, 3인칭의 죽음도 나에게는 실존적 고통을 주는 사건이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재의 고통은 나의 실존적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는 나의 죽음이든 너의 죽음이든 심지어 그의 죽음이든 다양한 죽음의 이야기 속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죽음의 서사 속에 있는 것이다.
--- p.169
분명한 점은 노화란 유한한 인간이라면 모두가 겪을 수 있는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행복한 삶이란 젊을 때의 행복한 삶에서 행복한 노년기를 맞으며 편안한 죽음으로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술했듯 노화는 질병에 쉽게 노출되어 고통받을 수 있는 과정일 수 있고, 각종 신체적 기능의 저하로 인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달리 보면 행복한 인생을 위해 행복한 노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한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노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노화는 삶의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노인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속에서 노화가 갖는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늙고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단순히 노화를 괴롭고, 싫은 것으로 치부하여 일상에서 망각해야 할 것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젊음과 건강만을 곁에 두고 질병이든 노화든 죽음에 가까운 것을 거부하고 추방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잠시 뒤로하고 우리는 노화로 인한 삶의 변화와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 p.224
과학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기대 수명이 연장되고 건강한 노년기의 삶이 길어지고 있다. 노인 인구는 이제 사회적 짐이나 수혜자로서만 존재하지 않으며 소비와 노동의 주체로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축적되는 경험과 지혜를 통해 드러나는 힘은 ‘긍정적인 노화’ 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고령화 추세에 따른 사회적 노력이 각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WHO에서는 노인들이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할 수 있도록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 존엄한 노년을 위해서는 노인 스스로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노인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발하고 ‘긍정적인 노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개인의 삶은 고립되거나 단절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 관계라는 시스템 안에서 변화하고 발전하며 생성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사회가 인식하고 있는 ‘좋은 죽음’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또한, 급격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사회가 ‘긍정적 노화’를 위해 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도 함께 생각해 본다.
--- p.247
수술용 로봇 기술의 발전은 의료 분야에서 이미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로봇은 사람보다 훨씬 정밀한 움직임을 실행할 수 있어, 고도의 정밀한 수술이 가능하다. 이는 특히 신경계나 혈관 등 세밀한 작업이 필요한 분야에서 크게 활용될 수 있다. 고도로 숙련된 의사들의 숫자는 부족하고, 그들에게 과도한 업무나 수술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로봇은 의사의 피로를 줄여줄 수 있는 보조적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술용 로봇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가장 큰 문제점은 비용의 문제다. 수술용 로봇의 개발과 활용에는 큰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가의 기술을 모든 사람이 이용하기는 어렵다. 이는 의료의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또한, 로봇이 수행하는 수술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술적 오류나 사고의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크다. 기술이 복잡해질수록,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찾기 어렵고, 이에 따라 기술적 오류나 의료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법적 책임을 누가 져야 할지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