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건은?”
하고 사나이는 짤막하게 물었다. 문희는 핸드백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난롯가 탁자 위에 놓는다.
“이분의 행방을 좀 알아야겠어요.”
사나이는 사진을 들고 본다. 삼십오륙 세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 사나이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문희를 바라보며,
“실종되었습니까?”
“아니에요.”
“그럼?”
문희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똑똑하다.
“여덟 시에서 열한 시 반까지,”
하다가 말문을 닫는다. 사나이는 다음 말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준다.
“어디에 가 있는지 그걸 알고자 합니다.”
--- p.13
“가정이라구요? 사막이죠. 그건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한 걸 거예요.”
문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넌 가끔 그런 말을 한다만 우리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네가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그만하면 그 사람이야 너에게 잘하는 편 아닌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평생 아이 없다고 탓하는 말을 하나, 결혼생활 십 년에 군말 한마디 없는 남편을 두고 왜 그러니.”
문희의 얼굴이 해쓱해진다.
“그이가 애기를 원하는 줄 아세요?”
“그러니까 마침 잘되지 않았어?”
문희는 찌그러진 미소를 띤다.
“그이가 이 세상에서 털끝만 한 애정이라도 바라는 줄 아세요?”
“애정은 주는 거야. 받는 건 아니거든.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한다면 여자로서 행복한 것 아니냐.”
[……]
“털끝만치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 털끝만치라도 남에게 애정을 베풀 것 같아요?”
--- p.19
‘어제 오빠보고 난 피아노 위에 먼지가 쌓였다고 했었지. 피아노 위에만 먼지가 쌓였을까? 내 몸뚱이에도, 내 영혼에도 무수한 먼지가 쌓여, 쌓이고 또 쌓여서, 난 어떻게 하지? 누가 그러더라? 절망했을 때보다 막연해졌을 때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더 많이 느낀다고. 나는 지금 막연하다. 뭣을 붙잡지 않는다면, 그것이 절망적인 일이라도, 아주 비극적인 일이라도…….’
--- 「방문객」 중에서
‘오빠는 지금 손짓발짓하고, 흥분했을 거야. 정말로 눈앞에 황금덩어리가 흘러가기라도 하듯. 그칠 줄 모르는 탐욕, 그것 이 남자가 지니는 힘의 상징인지도 몰라. 그런데 언니는 또 어떻고? 그 냉담한 성격에 남편의 사업을 돕는 일이라면 온갖 애교를 다 부릴 수 있는 여자지. 모두 다 살아 있다. 거짓이라도 좋아. 나에게도 누군가가 정열을 좀 준다면 이렇게 무의미하게 먼지에 쌓여 앉아 있지는 않을 거야. 미움이라도 좋고 노여움이라도 좋다.’
--- p.26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별안간 그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뭘?”
문희는 어리둥절해서 상대편을 본다. 격한 듯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는 웃고 있었다.
“형수씨는 오핼 하고 계시단 말입니다. 제가 욕심 없는 놀량패로 보입니까? 천만에요. 얼마나 큰 욕심, 야망 뒤에 절벽이 기다리고 있어도 나는 한번은 그것을 해치울, 해치울 것입니다. 틀림없이 한번은.”
“궁금하군요.”
“조금도 궁금하지 않으면서, 궁금한 일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
“서울흥신소에는 뭐 하러 가셨죠?”
조용히 물었다. 문희의 얼굴이 해쓱해진다.
--- p.38
“아까 당신은 말씀하시길, 까마귀는 요즘 집착하고 계시는 그림의 주제라 하셨죠?”
“…….”
“그럼 이상해요.”
하진의 눈이 더욱 번득인다.
“당신은 전에도, 아주 전에도 까마귀의 잠꼬대를 하신걸요.”
하진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주먹을 휘두르며 문희를 칠 듯 무서운 얼굴이 되어,
“내가 싫어하는 말은 묻지 말어.”
집이 흔들릴 만큼 고함을 지른다.
“나는 나, 너는 너야! 남의 마음을 다 제 것으론 못 한단 말이야!”
다시 고함 소리가 집을 흔드는 것 같다. 문희는 엎드려 울 음을 터뜨린다. 지금까지 그렇게 노한, 무서운 하진의 얼굴을 본 일이 없다.
“앞으로 두 번 되풀이했다간 이혼이다!”
--- p.68
하진은 이내 길모퉁이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문희는 그를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은 절망에 사로잡힌다. 코트 깃을 세우는 뒷모습에서 느낀 충동적인 애정의 감동이 아직 전신에 일렁이고 있는데 숨이 막히게 엄습해오는 절망, 너무 절박하여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뒷모습까지도 신경질적이야.’
중얼거리며 문희는 가까스로 뜰 안에 들어온다. 문을 닫아걸고 뜰 안을 지나온다.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절박했던 그의 마음과는 반대로 문희 얼굴에는 이상한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짓누르는 듯한 권태에서 놓여난 감정의 변화, 그것에서 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p.72
‘무엇이 그 옛날의 내 기쁨, 그 감동을 앗아갔을까. 나는 십 년 동안 무엇을 향해 투쟁을 했을까? 이제는 이렇게 지치고 힘이 다 빠져버렸는데…….’
빈 마음을 향해 몹시 허우적거려온 십 년의 세월, 문희는 그동안 소중한 자기 재능이 못 쓰게 되고, 음악에 대한 맑은 신앙과도 같았던 마음이 이제는 자기에게 한 오리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얇삭한 영혼으로, 예술에 대한 두려움 없는 허영으로, 그런 경옥이 지금은 당당한 피아니스트로 귀국을 하였다. 음악에 헌신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는 지금 허수아비 같은 한 사람을 잡고 메아리도 없는 혼자 넋두리로 온종일, 온종일을 허무하게 보내고 있지 않느냐. 도시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 p.78
포 소리가 멎은,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침묵의 전선…… 무엇이 일어날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무엇이 다가오고 있다. 아아, 수천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날아내린다. 날갯소리가 소나기 같구나. 온통 하늘이 까맣다. 푸른 구멍, 하늘 구멍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구나! 수, 숨이 막힌다. 아, 저, 저 마구 날아올라 가는구먼! 눈알을 다 빼먹은 까마귀 떼들이 날갯짓을 하며 춤을 추고 있다. 눈알이 빠져버린 송장이…… 그, 그런데 살아서, 숨이 붙어서 팔을 휘젓고 있지 않느냐!
--- p.102
“도둑이 제 발소리에 놀란다더니, 아 그래 유명한 음악가에 대해서 내가 뭐라 하든가요? 내 남편하고 연애하느냐고 물어본 기억은 없는데, 뭐가 더럽고 치사스럽소? 그거 어디 한번 물어봅시다. 뭐가 치사스럽고 더러운지.”
현숙이 경옥 앞에 바싹 다가서며 따진다. 일하던 일꾼들이 일손을 멈추고 비웃음을 띠며 구경을 한다.
‘밥 잘 처먹고 헐 일 없는 족속들의 심심찮은 치정극 구경이나 하자.’
그런 투의 눈초리다.
--- p.146
“경옥이가 당신에게 이겼다는 말은 하지 않습디까?”
웃는 얼굴을 돌리며 하진은 문희를 쏘아본다.
“무슨 뜻이죠?”
문희는 그를 올려다본다.
“난 경옥이하고 동침했어! 다이아몬드 반지도 선사했지!”
“네?”
“당신 올케처럼 질투하겠소?”
문희는 숨을 마신다. 심술이 잔뜩 오른 하진의 눈이 잔인하게 문희의 눈을 주시한다.
“시시한 얘기야. 사랑이 어디 있어? 모두 타인들이면서…….”
이번에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하진은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버린다.
--- p.151
“하기야 예술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란 유치하게 예민하고 약하니까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의 고통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것은 당사자들이 되어보지 못하는 한 모릅니다. 그러나 왜 하 선생이 그림을 못 그리는가 그것에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원인…… 게다가 그리지 못하는 고통, 두 가지가 겹쳐서…… 거의 발광 상태니까요. 오늘 같은 경우, 하 선생은 언제나 교수실을 들어올 때는 적군들 속에 들어오는 그런 눈초리를 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지 않는데도 역습하려는 그런 태도로 바뀌어졌단 말입니다. 그의 뒤통수에 총이 겨누어진 듯 홱 돌아서며 그 자신도 총을 뽑으려는, 마치 그런 자세란 말입니다. 부인께서는 요즘 하 선생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 p.179
그가 나가자 문희는 얼굴을 감싸고 소리를 죽이며 흐느껴 운다. 울면서도 문희는 자신이 진정 슬퍼서 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청승스럽게 훌쩍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운다는 사실과 문희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별개의 상황과 별개의 존재 같은, 정말 이상한 착각 속에 그 자신이 빠져들어 가는 것을 느낀다. 마치 손발이 저리는 것처럼 마음이 저려서 감각을 잃어가는 것과도 같이.
‘아무리 심각해 봐도 쇼 같은 것 아니냐?’
운다는 사실과 문희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더욱더 뚜렷하게, 그리고 그 사이를 이루는 거리는 강물의 폭 이 넓어지는 것처럼 자꾸만 넓어져서 마침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컬어지던 타인이라는 언어가 실로 자기라는 한 인간 속에서도 엄연히 대좌하고 있는 것을 문희는 소름 끼치게 깨닫는다.
‘온갖 것은 다 거짓이다. 슬픔이나 기쁨이나 행복 같은 것도! 아 아니, 정말 연극이란 말이야!’
--- p.208
“나는 문희가 행복하리라 생각했는데.”
염기섭은 푸듯이 뇐다.
“불행해 보이죠?”
“…….”
“저는 남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면 왜 사는지…….”
“그렇게 살다니?”
“타인 말예요.”
“타인…….”
“선생님은 부인을 타인이라 생각하세요?”
염기섭은 잠시 머쓱해진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사랑하고 안 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모순된 말인지는 몰라도…… 타인이라는 사실은 정말 엄연한 사실일까요? 물론 사실일 거예요. 하지만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을 믿는다면 도시 인간은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절망 외에 무엇이 있을까요?”
--- p.213
“이 세상에 제일 못난 짓이 사람을 사랑하는 거구, 병신스러운 유치한, 남이 볼 땐 말이지. 그러나 늙고 젊고 간에 여전히 그것은 갈망하는 이상한 것이거든. 잊을 수 없고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잊을 수 없는 것하고 사랑하는 것하고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 그분을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요? 아마 사랑했다면 그분의 알 수 없는 면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을 거구, 잊을 수 없다는 것도 아마 그 점 때문일 거예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분 역시 무의식적인 헌신을 바라지나 않았을까요? 저라는 여자는 너무 자아의식이 강한 편이었으니까, 그분의 비밀도 고통도 함께 모조리 감싸서 그 속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그런 여자는 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분의 비밀은 무엇이었는지, 그분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 신비스러움에 이끌리면서도 그것은 저에게 견딜 수 없는 고문이었어요. 이젠 그 고문에 이겨볼 수 없는 지경까지 왔어요.”
--- p.218
“나는 당신을 놓아주는 게 옳을 게요.”
하진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애당초부터 나는 결혼할 자격도 없고 여자를 사랑할 처지도 아닌 인간이었소. 그런 뜻에서 나는 문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오. 나는 가장 근본적인, 부부로서 가장 근본적인 희생을 당신에게 강요해온 셈이지. 누구, 다른 여자를 사랑했던…… 때문에 그런 것은 물론 아니오. 나는 이미 나 자신을 포함하여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인간은 모두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소. 내가 작품을 못 하는 이유는 거기 있는 거요.”
--- p.224
“정애!”
그는 정애를 덥석 안았다.
“사, 사랑해!”
정애는 몸부림을 치며 하영의 얼굴을 할퀴었다.
“나하고 농장에 가서 조용히, 조용히 살어. 넌 이젠 어른이야. 아무도, 아무도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하는 거야. 정애가 없어지면 난 살인을 할지도 몰라. 정말 악마가 될지도 모른단 말이야.”
하영은 정애의 가냘픈 몸을 양팔로 죄며 열에 들뜬 사람처럼 지껄였다.
“불쌍한 정애! 너는 내 살, 내 뼈, 내 심장이다.”
--- p.327
“나는 지리산 토벌대에 있었어. 그 까마귀, 무수히 많은 까마귀, 괴뢰군이 있는 곳에도 언제나 까마귀 떼들이 몰려 있었거든. 이쪽에선 그 몰려 있는 까마귀만 보면 그곳에 괴뢰군이 틀림없이 있는 걸 알아차렸지. 까마귀는 맨 먼저 죽음의 냄새를 맡은 거야. 싸움이 끝나고 거기 가보면 까맣게 내려앉은 까마귀, 미처 숨도 끊어지지 않은…….”
--- p.338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갔어요? 그건 전쟁이 빚은 악몽이에요. 우리들, 이 땅에 사는 우리들 어느 누구 한 사람 전쟁의 상처를 안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많건 적건. 그건 다 우리의 죄가 아니에요. 우리의 죄가 아니구말구요. 당신은 죄를 진 게 아니에요. 다만 형벌을 받았을 뿐이에요. 억울하게 형벌을 받았을 뿐이에요. 죽은 사람 산 사람 모두가 다, 우리 민족이 다, 우리 민족이 다 죄 없이 형벌을 받았던 거예요. 여보, 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 p.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