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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극장에서 나는, 검은 책을 읽었다

시인동네 시인선-230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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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80g | 125*204*8mm
ISBN13 9791158966430
ISBN10 1158966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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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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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기에 그는 이겨낸다’
나는 밀로슈의 이 말을
기린 카프카에게 주기로 하였다
일생을 통해 한 번도 울지 못한다는 기린,
위에 있으므로 그는 울 겨를이 없다
내려다보는 일만으로도 일생은 벅차다
새털구름은 기린 옆에 들떠 있다
구름이 천상의 악공이 아니라면
내려다보는 일은 격앙된 즐거움일 수 없다


나는 이 「기린 카프카」를
감았다 풀었다 연을 날리는 자세로
자새를 움켜쥐고 있다
기린 카프카는 위에 있기에
그의 겨드랑이는 점점 드러난다

문지방에 떨어지는 깃털
깃은 그라쿠스를 향해 자라고 털은
눈부신 밤, 격렬한 사정을 위하여 부풀어 오른다


그는 신으로부터 수수께끼를 부여받은 인간,
위에 있으면서 온갖 벌레에게 들킨 유일한 인간
--- 「기린 카프카」 전문

1. 에쁘롱(Eperon)

거기서는 며느리발톱이 지배할 것이다

세상에
짧게 만들다니!

그는 얼마나 권위적인가

2. 초월성의 음표, 트랩

초월성을 지니지 않은 문학은 끈적거릴 뿐 개운한 맛이 없다. 재래의 언어로 ‘비애’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문학은 ‘국물 없는 국밥’에 다름 아니다. 그런 비애는 초저녁에 차려낸 술상의 안주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니 술잔에 술이 그냥 남게 되는 형국은 한마디로 자신의 문학의 전복이나 개진이 아닌, 잔류라는 트랩에 걸리게 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겠다. 트랩을 통과한 서정춘의 여러 시들은 결심을 끝낸 ‘극약’의 정수리를 견지하고 있다. 그는 사물 혹은 대상과 싸우지 않고 초월한다. 그는 초월함으로써 시가 존재하게끔 만드는 유혹의 작용을 강화한다. 그의 비트는 시의 중간 중간 32분음표를 넘어선다. 그의 울림은 길다. 반면, 다들 짧다고 여기는 그 무엇은 긴 울림 안에 있는 어떤 반짝거림일 뿐이다.
--- 「서정춘」 전문

첫째로 천박한 시인이 있다. : 3C, 둘째로 깊은 시인 - 대상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 이 있다. : 2B, 셋째로 철저한 시인이 있다. 그들은 대상의 근본을 찾아 살린다. -- 이것은 단지 대상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가치가 있다! : 1A, 마지막으로 머리가 진흙탕 속에 박혀 있는 시인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깊음의 표시도, 철두철미함의 표시도 아니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지하의 것이다. : 1++A
--- 「등급」 전문

[근육]이라는 술집에 모여 시인들은 말한다. “매일 열심히 걷고 있어요.” 자신감을 드러낸다. 이 말은 “매일 열심히 쓰고 있어요.”인 것이다. 지구력과 신진대사의 촉진만으로 시라는 것이 활기차질까! “매일 새로운 생각을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시인은 드물다. 사유의 장딴지, 활배근 그리고 이두박근 - 그 말들은 이런 것을 내포한다. 시의 파워는 시인의 근육에서 나온다. 여러 근육 가운데 ‘정신’이란 근육은 쓰기라는 운동이 아니라 저항과 반성의 단련을 거쳐야 생긴다. 시로 평생 늙은 사람에게 기교는 멀리 있는 ‘열 자식’이고 (인식의 땔감인) 언어는 ‘스무 개의 치아’다. 이 말을 되새김질하면 이런 것을 뜻한다. 시의 효자는 기교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 - 씹는 즐거움 - 의 바탕인 언어군(群)-- 이다. 이 말은 다음의 말을 담보로 한다. 인생 후반이 그렇듯이, 시도 ‘씹는 힘’으로 버텨야 한다. 시의 늘그막을 받치는 힘은 근육에서 나온다. 걷는 것만으로는 근육이 줄어드는 걸 막지 못한다는 것을 세계 예술사는 증거하고 있다. 술집을 나설 때 보라! 그들의 말은 (등 근력을 잃어) 구부정하고 사레까지 걸려 (독자를 휘어잡는) ‘쥐는 힘[握力]’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근육은 시의 당화혈색소 - 감상혈색소를 잘 조절하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나는 오늘도 뒤로 걷고 앞으로 달린다.
--- 「근육」 전문

시에 돌 하나 놓아드리고 싶습니다. 시가 대나무를 닮았으니 그 곁에 야윈 돌을 놓겠습니다. 못생겼습니다. 뭉툭하지만 멀리 두 봉우리, 산이 있고 단단한 평지를 한참 지나면 물줄기 선명하게 떨어지는 낭떠러지도 있습니다. 흰 내림이 저고리 고름 같습니다. 대나무는 대나무끼리 얽매이지 않고 즐거워합니다. 바위는 아무래도 미불(米?)이 아니라 석중(石重)을 지기로 삼은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가 수사의 화려함 없이도 눈부시고, 검은데 환할 수 있겠습니까. 바람 불어 눈에 스치면 산초 열매인 듯 얼얼합니다. 무릎 낮춰 사철 풀꽃을 찾아 나서서인가요, 외로움이 맑음을 얻은 탓에 정신은 싸리채인 양 꼬장꼬장합니다. 그런 시에 여기 못생긴 돌 하나 놓아도 되겠습니까.
--- 「문이추(文而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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