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 옛날 그랫던 것 처럼 줄곧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잔뜩 곧추 세우고 있었습니다. ... 사는게 너무 지루하고 권태롭지 않니? 그냥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것 처럼 말야. 그리고 사실 내게는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고..... 편지를 읽을 때는 흥미롭지만 막상 답장을 쓰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게 아니란다.
그들은 늘 지쳐있거나 몹시 고독해. 무엇보다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그리고 중요한 건 어떤 희망적인 메세지를 줘야 하는 거야. 그녀는 제법 엄숙하고 진지해 보였습니다. 마치 이웃나라의 옴진리교 교주나 이 땅의 종말론을 전파하는 수많은 사이비 교주 같은 표정을 하고서 말입니다.
--- p.28
어쩌다가 그 외투를 태워먹었는지 모르겠어요. 초대받아 간 그 집이 유난히 춥긴 추웠더랬죠. 일행들이 맥주를 마시고 식은 낙지 볶음을 다시 데우고 생굴과 쪽파를 섰은 전을 한 장 더 지지고 누군가는 고스톱을 치는 사이사이, 저는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것유난로를 껴안다시피 하며 서 있곤 했었답니다. 해가 바뀌었으니 그게 벌써 지난 연말의 일이군요.
한껏 멋을 부리느라 외투속에 춘추용 검정 원피스를 입고 둥글게 파진 목둘레를 가리기 위해 벨벳 목도리를 한게 전부였습니다. 저녁 식사나 하자고 해서 나선 자리였는데 제가 아는 얼굴이라고는 저를 초대한 집주인 내외밖에 없었습니다. 실내에 들어서서 외투를 벗자마자 금방 팔뚝이며 목도리로 여민 목 언저리에조차 소름이 돋는것이 느껴졌어요. 그 집 남편이 카디건을 가져다 걸쳐주었지만 입지는 않았습니다.
--- p.11
양손에 사각 어항을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수족관 집 앞을 서성거리다가 셔터 밑 시멘트 바닥 위로 슬그머니 어항을 내려놓았습니다. 물이 출렁거리며 어항의 전으로 약간 흘러넘칩니다. 생혼(生魂)을 잃어버린 거북이는 이미 죽어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머리까지 몸통으로 안으로 집어넣은 거북이는 한 개의 푸른 돌 같아 보입니다. 핏줄도 생명도 없는 돌멩이 말입니다. 미혹에 사로잡힌 것마냥 얼마쯤 더 그 자리에 움치고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떳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거북이는 눈을 뜨게 될까요?
--- p.37
새벽 세시에 나는 홀연히 잠에서 깨어났다. 방안은 검은 잉크를 흩뿌려놓은 듯 어두웠다. 가을 내내 혼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침이면 입가에 허옇게 침 자국이 남아 있었고 잠들기 전 두통 약 한 알을 네 조각으로 쪼개 먹어도 늘 머리가 아팠다. 잠에서 깨어난 건 두통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무릎을 꿇고 앉아 어둠의 심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꿈 한번 꾸지 않고 내리 이틀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깨어났을 때처럼 머릿속은 명징했고 두통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차 어둠에 눈이 익을 무렵 나는 무엇에 이끌린 듯 책상 위에 놓인 망원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한 마리 전갈처럼 팽팽히 꼬리를 치켜든 채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이트 비전의 붉은 렌즈 속에 의혹을 가득 품고 있는 나의 눈동자가 그대로 비춰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잠을 깨운 것은 두통이 아니라 한밤의 망원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pp.51-52
내 몸은 다 타버린 한점 재처럼 하늘 여기저기를 날아오르고 있다. 나는 자주 뜨거운 전류가 흐르고 있는 고압선에 걸리기도 하고 활처럼 휜 새의 부리에 가 닿기도 한다. 낯선 음부의 혼들이 후들거리는 내 팔다리를 붙잡고 자꾸만 저쪽으로 잡아당기기도 한다.
--- p.91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시력이 떨어진 것은 그 무렵부터이다. 망루에서 바다 물빛만 보고도 숭어떼의 위치를 알아내는 늙은 망지기처럼 한곳에 오래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퍼렇게 몸을 뒤척이는 바다 물빛도, 떼를 지어 몰려드는 숭어떼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동공이 확대되면서 시야가 흐려지곤 하였다. 마개가 막힌 두꺼운 유리병 속에 들어앉은 듯 사위가 어둑해지고 시계(視界)가 좁아졌다.
저쪽 먼 곳의 등대 불빛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조차 그것이 등대 불빛인지 흐린 하늘을 열고 가까스로 나온 별빛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등기 우편물을 일반 우편물함에 집어넣는가 하면 상추를 쑥갓인 양 태연히 집어들기도 했다. 시력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해가 이우는 도시는 수면 깊이 가라앉은 오래된 해저 도시처럼 짙은 잿빛으로 물들어 보였다.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널 때마다 수심 5백여 미터도 넘는 해저 도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 안개에 휩싸인 불그스름한 태양은 느릿느릿 서쪽으로 이울고 교각들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불빛은 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핏물처럼 흐릿하게 번져들었다.
-<망원경> 처음부분
--- pp.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