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문명이 견고하고 튼튼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문명은 부드러운 빵이기 마련이다. 버터, 크림, 밀가루뿐 아니라 색과 공기, 솜사탕으로 만들어진다. 반은 강제적인 힘, 반은 자연스러운 전통으로 이루어진 문명은 자신감이 자랄수록 점점 더 영예로워지고 점점 더 불안정해진다. 웨스 앤더슨이 만든 허구의 중유럽 주브로브카 네벨스바드에 있는 유명한 멘들 빵집의 코르티잔 오 쇼콜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INTRODUCTION」중에서
‘우리 부모와 조부모 세대는 훨씬 좋았다. 그들은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깔끔한 일직선으로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부러운가? 잘 모르겠다. 그들은 진짜 고통에서, 악의와 운명의 힘에서 멀리 떨어져 꾸벅꾸벅 조는 듯 삶을 살았지만 편안함이 낡은 신화가 되고, 안전은 유치한 꿈이 된 우리는 우리 존재의 하나부터 열까지 긴장을 느끼고 있고, 무엇에 대한 공포를 늘 새롭게 신경마다 느껴야 한다. 우리 삶의 매 시간은 세계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 비탄으로 또 즐거움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은 삶 저 너머의 역사와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 너머의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모두는, 가장 어린 인류라도, 우리 선조의 가장 현명한 사람보다 현실에 대해 천 배는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 대가를 완전히 치렀다.’ ---「INTRODUCTION」중에서
마지막 숏들은 ‘유산으로서 스토리’라는 개념을 납득하게 만든다. 늙은 작가가 소파에 손자와 함께 조용히 앉아 있다. 그는 제로와 대화하던 밤에 입었던 것과 비슷한 노퍽 슈트를 입고 있으며 1968년의 호텔 과 비슷한 장식의 서재에 있다. 젊은 작가의 목소리는 늙은 작가의 음성으로 바뀐다. “매혹적인 낡은 폐허였지만, 다시 가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묘지에 있는 소녀로 돌아가, 소녀는 책을 덮는다. 삶은 스러진다. 예술은 남겨진다. --?「CRITICAL ESSAY」중에서
물론 웨스 앤더슨에게 ‘초안 같은 것’은 다른 감독에게는 완성품이다. 그날 본 편집본과 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완성작 같았다. 여러 겹으로 중첩된 스토리 전개 장치부터 시계태엽처럼 딱 맞물려 돌아가는 등장인물과 사건까지, 영화가 전작들에 비해 어찌나 복잡해 보이는지 딱 한 번만 보고 웨스와 인터뷰할 생각을 하니 두려울 지경이었다. ---「유럽이라는 아이디어」중에서
Q : 실제로 우주에서 촬영하는 SF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죠? 그냥 농담이었나요?
A : 아뇨, 그럴 의향이 있습니다.
Q : 네, 이제 큰 질문이 남았군요. 감독님의 영화 세계에서 신이 존재하나요? 만약 존재한다면, 그 신은 위에서 지켜보고 있나요, 아니면 직접 간섭하나요?
A : [긴 침묵] 신이 간섭합니다. ---「웨스 앤더슨 : 세 번째 인터뷰」중에서
츠바이크의 알프스 별장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분명히 연결된다. 이 연결은 꼬리를 무는 연상 작용을 선언한다. 유럽의 사라진 과거를 찬양하고 자신의 과거를 전하는 데 열중한 츠바이크, 자신이 사랑하는 호텔이 ‘빌어먹게 추잡한 곰보 파시스트 개자식’의 손에 넘어가거나 폭격에 재가 될지 모를 가능성을 미리 막으려는 구스타브, 구스타브의 스토리를 적당한 때에 전달하려는 늙은 제로, 프롤로그를 방해하다가 옆에 서 있는 손자로 대표되는 미래 세대에게 다시 스토리를 전달하려는 ‘작가’. 이 모든 노력이 멘들 빵집의 분홍색 상자에 담겨 묘지 시퀀스에서 리본으로 묶인다. 영화는 책이고, 책은 제로의 스토리고, 제로의 스토리는 구스타브의 스토리고, 구스타브의 스토리는 그랜드 부다페스트이고, 그랜드 부다페스트는 츠바이크의 알프스 별장이고 오스트리아고 유럽이고 모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졌다. 모두 다. 스토리만 남는다.
---「어제의 세계들 by 알리 아리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