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걸은 초검 시형도屍形圖(검사를 위해 시체를 그리는 것)를 살펴보았다. 왼쪽 가슴에 난 자상刺傷이 사망 원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도적이 저지른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포도대장 변양걸은 유희서의 몸에 난 자상이 칼을 잘 다루는 자의 소행이라는 것을 시형도만 보고도 짐작했다.
--- p.23
검시관들이 사체를 검시해보니 새끼줄이 감겨 있는 여인의 목에서 액흔縊痕(목을 맬 때 목 주위에 남는 상처)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이 목을 매어 자살할 때는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나뭇가지도 새끼줄에 의해 껍질이 벗겨지는 등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인이 목을 맨 나뭇가지는 깨끗했다. 그리고 온몸에 멍이 들거나 핏자국이 엉켜 있는 것으로 보아 목을 맨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84
“의심이 들어 바로 민발의 첩 막비의 집에 이르러 보니, 외청外廳의 벽에 뿌려진 피가 가득한데, 종이를 바르고 혹 피를 닦은 흔적도 있으며, 청 바닥에는 흙을 깎아버리고, 또 모래로 피를 덮은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피냐고 물으니, 그 집 사람이 황급하게 대답하기를 ‘말을 치료할 때 흘린 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작은 철창鐵槍을 찾았는데, 이석산 시체에 난 구멍과 맞추어보니 서로 딱 들어맞았습니다.”
--- p.115
박 소사의 시신은 이미 매장을 끝낸 뒤라 묘지를 파내 검험을 하기가 어려웠다. 평산부사 정경증은 일단 『무원록』에 나오는 검법을 바탕으로 먼저 시친을 불러 자세하게 조사를 했다. 하지만 관아에 신고를 하지 않고 매장했다는 사실만 정확할 뿐 목이 졸려 살해를 당했는지, 스스로 목을 맸는지,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것인지, 자살을 하기 위해 스스로 목을 찌른 것인지〔大抵被縊自縊 被刺自刺〕 정확하지 않았다. 진술자들이 횡설수설하는 가운데 시어머니 최아지와 죽은 박 소사의 남편 조광선趙匡善은 박 소사가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p.130
“어머니, 저는 복수하러 갑니다. 지금 안 소사를 칼로 찔러 죽이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고는 피에 젖은 치맛자락을 펄럭이면서 최정련의 집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손에는 날이 시퍼런 부엌칼이 들려 있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네가 어찌 사람을 죽였단 말이냐?”
어머니가 은애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울부짖으며 말했다.
“어머니, 안 소사는 물론 최정련이도 저의 정절을 더럽혔으니 그 역시 죽여서 반드시 복수를 하겠습니다.”
--- p.160
“원인은 상관없다. 종이 주인을 살해했으니 윤리를 저버린 것이다.”
형조에서는 연향의 죄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의를 했다. 상민의 경우 처자식이 살해당하는 현장에서 복수를 하면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무죄가 된다. 그러나 종이 주인을 살해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 죄에 해당된다. 『대명률』의 ‘모살조부모부모謀殺祖父母父母’ 조목을 보면 ‘노비로서 가장을 모살하면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 형률로 적용한다’고 했고, ‘사수복주대보死囚伏誅大報’ 조목에는 십악十惡쪹의 죄를 범한 사형수는 부대시로 집행한다’고 되어 있다.
--- p.177
조선시대에 검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조직 폭력은 사실상 그 역사와 뿌리가 깊다. 검계라는 공식적인 이름으로는 불리지 않았으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태조 때부터 무뢰배들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무뢰배들은 조직 폭력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도적 무리에서 점차 조직 폭력배로 발전했다. 검계의 구성원 중 상당수가 별감 등 대궐을 호위하는 무사 출신이다. 이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천민에서 상민으로 면천되었고, 군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무리들을 모아 결당했다. 일본에 낭인들이 횡행하게 된 것도 전국시대를 지나 막부시대가 도래하여 주인 없는 무사들이 떠돌면서 비롯된 것이다.
---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