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특급우편」
최초의 연인인 어머니를 떠나보내려는 아들의 소름끼치고 무심한 독백.
그의 등짝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어머니,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점점 가벼워지는 어머니는 시체나 다름없다. “거죽까지 석회질이지 싶은 발가락이 차갑게 얼어 있었다”는 문장이 암시하듯 어머니가 이미 죽어 있을 것이라는 공포스러운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그의 기억은 태초의 시간과도 같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전 세상에 단둘밖에 없던 시간, 그는 ‘열기를 가누지 못하고 내달리던 수소처럼’ 어머니를 강간했고 그 기억은 ‘목구멍을 단단히 틀어막은 코르크 마개’처럼 그의 삶을 지배한다. 그는 이제 어머니가 아닌 다른 대상을 사랑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원죄와도 같은 고통스런 기억에서 놓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행복해지기로 마음먹고 어머니를 멀리 날려 보낼 준비를 한다.
그는 알았다. 자신은 오이디푸스이며 롯의 딸이며, 현대에 이르도록 은밀히 지속되어진 몹쓸 사랑의 희생자라는 것을. 그리고 또한 티아맛의 아들 중 하나이며, 바빌론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마침내 자신에게 끼쳤음을. 어머니였던, 돌이었던, 바스라지기 쉬운 무엇이었던 그것은 어느덧 하늘로 날아오르고 말았다는 것을. ---「바빌론 특급우편」중에서
「붉은 이마 여자」
환상과 무의식을 교차하는 분열증적인 언어로 점철된 ‘그녀’의 기담.
첫째 날, 막 태어난 그녀.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들리는 것, 맡아지는 것 외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배냇저고리를 벗어 던진다. 그녀는 목소리를 따라가다가 할아버지를 만나고, 할아버지로부터 물결과 같은 춤을 배운다. 둘째 날에는 “네 뼈는 더 부드러워져야 하고 네 근육은 더 강해져야” 한다는 또 다른 할아버지를 만난다. 셋째 날에는 숲에서 진홍색 카펫을 짜고 있는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는 그녀를 카펫에 태운 채 산등성이를 날아다닌다. 넷째 날에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며 ‘관능’이 피어나는 것을 느낀다.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그녀는 끊임없이 카펫이나 텐트나 롤러코스터를 타고 날거나 돌거나 달리거나 걸어 다닌다. 그리고 절규하듯 ‘아아, 넌 누구지, 넌’ 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인지’ 혼란을 거듭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이 여자이고 남자이며 할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이라고 깨닫는다.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빙글빙글. 그녀의 몸은 흐트러짐 없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소용돌이로 보랏빛 공이 들어오고 흩어지던 구름이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이빨이 서너 개밖에 남지 않은 검은 프록코트의 할아버지까지 그녀의 몸으로 수렴되었다. 이러다가는 그녀인지 남자들인지 할아버지인지 알 수 없는 물체로 녹아내리지 않을까, 그녀는 소용돌이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붉은 이마 여자」중에서
「말해줘, 미란」
병리적인 집착과 사랑이 불러오는 가혹한 폭력.
다분히 병리적인 주인공이 아내에게 가혹한 폭력을 가하고 또 묘령의 여인을 겁탈하려다 잡혀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내용. 그는 시종 ‘미란’이라는 이름의 개를 딸이나 아내 대하듯 하면서 말을 가르치고 끔찍하게 보살핀다. ‘무엇을 기억하고 있고 무엇을 잊었는지, 아니, 무엇을 기억해내야 하며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주인공은 진실을 종용받다가 종국에는 그 개의 이름이 사실은 아내 ‘허미란’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니까, 미란이라는 이름이 이제 생각났단 말이죠. 아니, 이제 생각나다니요. 미란이가 생각나고 말고가 어딨어요. 그녀가 미란이를 두고 가버렸다니까요. 도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신의 아내, 허미란 말고 또 누가 있나요.
---「말해줘, 미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