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광장과 밀실, 두 개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광장에서만 살 수도 없고, 또 밀실에서만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광장에서는 필연적으로 피로와 상처가 동반되는데, 그것은 밀실에서만 치료와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밀실에서는 이런저런 자신만의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생각과 반성은 광장에서 그것이 유아적 망상이 아님을 확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두 개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처럼 두 개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광장이 전부인 사람들도 있고, 밀실이 전부인 사람들도 당연히 있겠죠. 광장이 전부인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뭔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게 될 가능성이 있고, 밀실이 전부인 사람은 자기 혼자만의 망상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략)
제가 보기에 철학은 완벽한 밀실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이라는 밀실은 단순히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밀실이 아닙니다. 철학이라는 밀실은 자신의 생각을 ‘메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대상이나 목적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그 대상이나 목적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학이라는 밀실에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머리말」중에서
지금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죠. 그런데 21세기에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구평평학회라는 단체는 우주에서 찍은 지구 사진은 나사에서 조작한 것이고, 지구는 지름 4만 km의 원판이며, 가운데에 남극, 바깥쪽에 북극이 있고, 태양과 달은 원판 위를 돌고 있으며 우리가 보는 밤하늘은 원판을 덮고 있는 뚜껑이라고 믿어요. 이들은 미국인의 2%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다고 주장해요.
1000년 후의 사람들은 21세기의 지구평평학회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어처구니없다고 하겠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이론이나 신념 중에서 이와 비슷한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 없을까요? 장담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1장 존재론―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 / 아낙시메네스 : 만물은 공기다」중에서
“뭐 이런 걸 꼭 철학이라고까지 해야 해?” 철학공부를 하다 보면 이런 말을 할 만큼 뻔하고 당연한 주장도 있고,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했을까?” 이런 말을 할 만큼 엉뚱하고 황당한 생각도 있어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생각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 없는 놀랍고도 창의적인 주장을 한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파르메니데스입니다.
---「1장 존재론―재미있게 철학합시다/데모크리토스 : 원자론」중에서
플라톤은 이데아로 가는 직선도로를 고집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세계와 타협하며 다양한 질료와 형상이 운동과 변화를 하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목적지는 이데아로 같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지성 버트런드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리켜 “상식으로 희석된 플라톤 철학”이라고 했는데 대체로 맞는 표현인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키워드는 이것입니다. “플라톤은 이데아 매운맛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순한맛이다.”
---「1장 존재론―이데아 순한 맛/아리스토텔레스 : 형이상학 (feat.플라톤)」중에서
헤겔 철학은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합니다. 하지만 헤겔을 해야 그다음에 키르케고르와 마르크스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한번은 넘어야 할 산입니다.
헤겔의 철학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워낙 방대하기 때문인 듯해요. 근대 철학자들은 주로 실체, 속성, 자아 같은 문제를 나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데, 헤겔은 마치 자신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 된 것처럼 세계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완전히 성장해서 끝날 때까지의 전체 역사를 통째로 놓고 이야기하니,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좁은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의식이 경험을 통해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절대정신에 도달하는 과정을 7단계로 설명합니다.
저는 감각을 40억 년 전에 존재했던 아메바의 감각으로 놓고, 자기의식을 인간의 의식으로 놓으며, 절대지를 40억 년 후 새롭게 나타날 신인류의 정신으로 놓고 각 단계를 설명해볼게요.
---「1장 존재론―돈키호테가 된 나폴레옹/헤겔 : 정신현상학 1,2」중에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죠. 별 생각 없이 그냥 살아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좋은 학교, 승진, 사회적 명성, 돈을 얻으려고 버둥거리며 삽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뭔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똑바로 보고 나서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이것이 죽음을-미리-앞서-봄의 의미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얘기를 들어보죠.
“17세 때 이런 경구를 봤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언젠가는 그 길이 옳았음이 보이리라.’ 그후로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마다 가장 중요한 연장이었습니다. (중략)
어렸을 때 『전세계편람』이라는 재기 발랄한 잡지를 좋아했는데, 마지막 호의 뒤표지에 모험을 떠나는 사람이 만났을 법한 시골 길 사진 밑에 이런 문구가 실려 있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항상 갈망하세요, 미련할 정도로 추구하세요. 항상 저 자신이 그러길 바랐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여러분에게도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학 졸업 축사2005.6.12 중에서)
죽음을 앞두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보입니다. 그 중요한 것을 뺀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것이죠. 이처럼 현존재는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앞서 가서 봄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현존재의 가장 본래적인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장 존재론―스테이-헝그리, 스테이-풀리시 /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feat. 스티브 잡스)」중에서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바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이 질문에 대해서 철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대답을 내어놓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철학을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이때의 새로운 개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다른 철학적 개념들이 서로 접속하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이 접속하면서 ‘이데아’ 개념이 생겨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접속하면서 ‘가능태’라는 개념이 생겨났죠. 그리고 플라톤과 플로티노스가 접속하면서 ‘일자’ 개념이 생겨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접속하면서 ‘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또한 과학혁명과 데카르트가 접속하면서 ‘코기토’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데카르트와 칸트가 접속하면서 ‘시간과 공간’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칸트와 헤겔이 접속하면서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헤겔과 마르크스가 접속하면서 ‘착취’ 개념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들뢰즈나 되니까 할 수 있는 소리죠. 들뢰즈는 서양철학사를 꿰뚫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양철학사가 무엇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발전을 해왔는지 아마 꿰뚫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접속을 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접속을 하면서 새로운 철학적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겠죠.
먼저 철학적 개념의 체계를 만들어놓아야 해요. 철학적 개념들이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야 철학적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체계를 잡기 위해서는 『5분 뚝딱 철학-생각의 역사』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유튜브만 보면 영상에 순서가 없기 때문에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책을 보면 내용을 체계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장 존재론―막장 드라마는 이제 그만 / 들뢰즈 : 차이와 반복, 나무와 리좀, 사건의 존재론)」중에서
간혹 저에게 “형이상학을 왜 공부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현실세계에서 도대체 형이상학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죠. 제임스의 표현을 빌자면 형이상학에는 현금가치가 없지 않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임스는 많은 철학적, 형이상학적 논쟁을 현금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논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 과학철학에는 현재주의와 영원주의 사이의 박 터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현재주의는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영원주의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 이 논쟁에 빠져서 몇 년을 매달려 공부한 적이 있어요. 이 형이상학적 문제는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인 이유에서뿐만이 아니라 저의 현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였어요. 왜냐하면 현재주의를 받아들이면 지금 이 순간은 바로 지나가 없어져 버리지만, 영원주의를 받아들이면 지금 이 순간은 어딘가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삶의 태도와, 지금 이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삶의 태도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주의가 옳은가, 영원주의가 옳은가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는 무의미한 논쟁이 아니라 굉장히 실용적인 문제일 수 있어요. 말하자면 현금가치가 높은 문제일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 형이상학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 “형이상학을 왜 공부하냐?”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장 인식론―당신의 신은 얼마? / 실용주의(feat. 퍼스, 윌리엄 제임스, 듀이)」중에서
흔히 사람들은 “철학에는 정답이 없지만, 과학에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특히 물리학과 같은 학문에는 명백한 정답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철학이든 과학이든,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정답 같은 것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상대성이론 자체가 명쾌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성이론은 수학적으로 명쾌하게 증명된 이론이죠. 하지만 문제는 상대성이론을 유도하는 수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입니다. 이 점에 많은 견해가 있을 수 있어요. 이러한 것들을 다루는 학문이 바로 물리학의 철학이라는 분야입니다.
---「4장 과학과 수학―마이너리티 리포트 / 아인슈타인 : 쌍둥이 역설이 진짜 역설이 아닌 네 가지 이유」중에서
튜링머신은 생각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는 자아개념이 있고, 튜링머신은 자아개념이 없으므로, 인간의 생각과 튜링머신의 계산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요? 만약에 이 둘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면,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나 유튜브 알고리즘이나 인공지능은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저 복잡한 튜링머신일 뿐이니까요. 그런데 만약 튜링머신이 자아개념을 가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처럼 자신의 CPU를 뽑으려는 데이비드에게 나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할HAL과 같은 인공지능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리플리컨트와 같은 인공지능이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이런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철학책에서 “웬 튜링머신이냐?”고 하겠지만, 사실 이것은 준비운동에 불과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철학적 문제를 다룰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튜링머신의 계산과 인간의 생각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즉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통해서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4장 과학과 수학―알파고의 창조주 / 튜링머신 : 인공지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feat. 괴델, 힐베르트)」중에서
인간은 각 단계의 위기를 긍정적으로 극복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긍정적으로 자신의 위기를 극복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세상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완전히 자율적이고 주도적이며 근면하고, 자아정체성이 확고하며,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일에 대해서 생산적이며, 노년에는 자아를 통합하고,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나요?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그는 또라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 수도 없을 뿐더러, 또 그렇게 모든 위기를 긍정적으로 극복하면서 사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에요.
영아기에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아기는 성인이 되어 인간에 대한 무한신뢰로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유아기에 수치심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성인이 되어 불한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정체성 혼란을 겪지 못한 사람은 다 큰 성인이 되어 정체성 혼란을 겪을 수도 있어요. 마찬가지로 고립된 경험이 없으면 친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자아를 통합할 수 있겠어요? 에릭슨은 삶의 모범답안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가능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모범답안일 뿐입니다.
그러니 나의 삶이 에릭슨이 제시한 모범답안에서 많이 떨어져 있다고 해서, 나의 삶에 대해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한 사람의 일생은 그렇게 간단하게 평가되거나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Who Am I?
---「9장 심리학―재미없는 모범답안 / 에릭슨 : 자아심리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