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다들 나이 들면 적당히 결혼하고 살아가는 건가 봐. 많은 걸 알게 돼서.” 바나가 씁쓸하게 말했다. “어릴 땐 그렇게 생각하잖아.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근데 그게 아니라, 결혼할 때쯤 만난 사람이랑 결혼을 하는 거지.”
“사랑은 허상이지.” 지안이 과장되게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뭐가 웃긴 거야?
“그 말엔 동의 못 하겠는데요.” 바나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난 널 사랑했는걸요?”
“나도 사랑했지.” 지안이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뒤지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분위기가 민망해지지 않도록 농담을 섞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데 왜 사랑이 허상이래? 우리의 과거를 부정하지 마.” 바나가 딱 부러진 말투로 다그쳤다.
“부정하는 게 아니고, 일시적이라는 거야.” 지안이 바나의 딱딱한 말투에 맞추어 이번엔 진지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과거의 지안이 사랑에 대해 설명할 땐 도연과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랑 그런 시간들을 보내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일시적인 것도 존재하는 거야.” 바나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존재‘했던’ 거지.” 서로 양보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대화였다.
“존재‘하는’ 것이든, 존재‘했던’ 것이든, 어쨌든 존재는 존재야. 그 시간대에 있는 거라고. 이러다 양자역학까지 가겠네.” 자조적인 농담을 던진 바나는 갑자기 기분이 싸하게 식어버렸다. 가슴속 어딘가 굳어버린 응어리가 느껴졌다. 그녀의 축축한 머리카락처럼 차가운 응어리.
--- pp.41-42
“야! 우리 커플인 줄 알았나 봐.” 깔깔거리며 바나가 말했다. “2000원 굳었구만.”
“물어보지도 않고 해줄 줄은 몰랐네.” 지안 역시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가 좀 잘 어울리는 외면이긴 하지.”
맞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눈이 쭉 찢어진 게 닮기도 했고, 말투나 행동이 워낙 비슷해서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심지어 종종 남매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넌 잘생겨서 남자친구로 두면 자랑스럽긴 할 것 같아.” 바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물론 백현우도 귀엽긴 하지만, 한지안은 ‘잘생겼지’.
“맞는 말이군.” 지안이 진지하게 수긍했다.
“근데 넌 남자친구로서는 빵! 점이야.” 바나가 ‘빵’이라는 단어에 엄청난 힘을 실어 말했다.
“왜?” 지안이 정색하고 물었다.
“친구로서는 백 점―!”
“그러니까 왜.” 지안이 집요하게 물었다. “니가 내랑 사귀어봤나?” 약간은 기분이 나쁜 티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바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연이랑 사귈 때 옆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으로서, 타당한 가설입니다”라고 농담조를 섞어 대답했다. 그러자 지안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살짝 열었지만 금세 다시 다물고 말없이 걸었다. ……뭐지?
--- pp.71-72
“바나야―.”
지안이 바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바나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지안의 목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뭐지? 의아했고, 혼란스러웠다. 지안의 얼굴엔 ‘또 흘리냐’ 하는 표정과 함께 걱정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뭐지, 진짜? 그는 재빨리 바나의 손에 있던 이쑤시개를 뺏어 떡볶이에 꽂고, 들고 있던 콜라를 이쑤시개를 들고 있던 손에 쥐여준 뒤, “기다려라”라는 말을 남긴 채 회오리감자를 들고 사라졌다. 바나는 한 손엔 떡볶이, 한 손엔 콜라를 들고 넥워머에는 떡볶이 양념을 잔뜩 묻힌 채로 놀이기구를 타려고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에 껴서 지안을 기다렸다. 이름을 불러준 건 처음인데.
돌이켜 보니, 지안은 한 번도 바나의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었다. 항상 ‘야’ 혹은 ‘어이’로 그녀를 불렀던 지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걱정과 애정을 잔뜩 담은 목소리로 ‘바나’라는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 순간 바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놀이기구가 상공 70미터까지 올라가 멈췄을 때 나는 덜컹―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몇 분 뒤, 지안은 어디선가 휴지와 물티슈를 구해 왔는데, 자신이 들고 있던 회오리감자마저도 콜라를 들고 있는 바나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으며 “이것도 잠깐 들고 있어라”라고 했다. 그리고 휴지와 물티슈로 그녀의 넥워머를 꼼꼼하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갈해서…… 아니, 사실은 너무나도 정성스럽고 다정해서 바나는 순간적으로 지안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와락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럴 순 없었다. 첫째로, 아직 넥워머에 묻은 양념이 덜 닦였으며, 둘째로, 손에는 회오리감자와 떡볶이와 콜라가 들려 있었고, 셋째로, 그냥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충동적인 마음과 이성적인 판단이 바나의 머릿속에서 폭력적인 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지안은 여
전히 시계 장인이 시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을 끼워 넣는 것처럼 집중력을 발휘해 넥워머 뜨개실 사이사이에 스며든 떡볶이 양념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 pp.81-82
“진짜로 헤어지고 와. 최대한 빨리.” 그는 뒤에 ‘기다릴게’라는 말을 생략한 듯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가?
“응.” 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이 만족스러운 듯, 하지만 조금의 긴장을 담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하지만 바나는 곧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귀게 되면, 친구로는 끝인 거 알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거야.” 걱정스럽고 두려운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러자 조금 전 지안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인상을 팍 찌푸리기도 했다.
“왜 말을 그렇게 하노.” 사투리가 진하게 박힌 억양이 그의 격앙된 감정을 설명해 주는 듯했다.
“맞잖아. 사귀면 헤어질 수도 있는데…….” 바나는 자신의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지안이 그녀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왜 벌써 헤어지는 걸 생각하는데? 우린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니랑 사귈 수 있을지도 내 입장에서는 아직 미지수인데.” 화도 화지만, 서운함이 잔뜩 담긴 문장이었다.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지 지안은 바나를 향해 “사람이 왜 그렇게 부정적이고?”라는 비난까지 해버렸다.
“내 말이 틀려?” 그냥 넘어갈 바나가 아니었다.
--- p.168
“아― 그럼 진짜 바나 언니랑 사귀는 건 아니구나?” 해영은 기숙사 앞의 큰 벚나무를 구경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거 봄에 엄청 예쁘겠네요?”
“꽃을 좋아하나?” 지안이 물었다. 이제 곧 재채기 엄청 하겠네. 지안은 봄이 오면 바나가 풀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할 것을 걱정했다.
“아뇨. 꽃 같은 건 별로…….” 해영이 절레절레하더니, 다시 눈을 반짝이며 지안에게 물었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맛집? 아니면 술집은 어딨어요?”
“종류가 많은데.” 지안은 뒷짐을 진 채 벚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했다. “어떤 유를 원하는데?”
“그냥…… 바나 언니랑 어디를 제일 자주 갔는데요?”
--- p.179
“너, 류해영이랑 영화 봤지?” 그녀가 지안의 코앞에 멈춰 서서 눈을 날카롭게 뜨며 물었다.
바나는 이미 답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 질투나 분노 같은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촉이 맞다고 확신하지만 그래도 본인 귀로 직접 대답을 듣고 싶은 심정만이 남아 있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알았는데?” 지안은 시인 대신 그녀의 추리에 놀라는 쪽을 선택했다.
“넌 프로필 사진을 잘 바꾸지 않으니까. 넌 필터 어플이 없으니까. 누구랑 보러 가는지 나한테 얘기하기 싫어했으니까.”
“그걸로 알았다고?” 지안이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우리 둘 다 팝콘이 싫다고 했으니까. 근데 넌 팝콘을 들고 있었지.”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말싸움을 시작했다. 바나는 지안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지안은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고 반박했다. 한국에서는 동갑끼리를 ‘친구’라고 칭하는 문화가 있다지만, 지안은 해영과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고 딱히 다른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친구’라 지칭했을 뿐이니까.
“그럼 그냥 류해영이랑 보러 간다고 하면 되잖아?” 바나의 말에 지안은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스스로도 콕 집어 해영과 영화를 보러 간다고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 pp.199-200
“형, 옹실옹실이라는 말 알아?” 지안이 묻자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안은 사촌 형에게 이 단어의 뜻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스스로도 잘 몰랐고, 심지어 이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조차도 정확한 뜻은 모른다고 대답했던 말이었기에 딱히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뜻인데, 그게?”
“몰라, 나도. 그냥 지금…… 옹실옹실.” 지안은 물속에서 의미 없이 손을 휘휘 저었다.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다. 지안은 여행을 잘 즐기고 있는 만큼이나 바나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둘째 날의 일정이 끝난 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본의 택시 기사는 장부로 고객의 명단과 택시비를 기록하는 아날로그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들이 지안의 마음에 아주 쏙 들었다. 친절한 사람들, 정갈하고 정숙한 분위기, 아기자기한 동네와 맛있는 음식들. 언제 같이 올 수 있으려나. 이 고요하고 친절한 나라에, 죽도록 보고 싶은 그녀가 없다는 사실에 한이 맺히는 것도 같았다.
택시에서 내렸을 때 지안은 숙소로 돌아가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자 사촌 형이 뒤따라오다 하하 웃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사촌 형은 이런 지안의 모습이 귀엽고 생소한 모양이었다. 조급한 지안의 발걸음이 지금 그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 pp.227-228
“내가 뽀뽀하면 어떻게 할 거야?” 전에 라멘을 먹고 나오면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던졌다.
“흠, 글쎄?” 지안의 대답에 바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지안은 명백히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게 바나의 심기를 더 뒤틀리게 했다. 글쎄에―?
“글쎄라니?” 바나가 사납게 물었다. “너 나 좋아하잖아.”
“좋아하지.”
“근데 왜 뽀뽀 안 해?” 떼를 쓰는 아이 같기도 했고, 목소리에 억울함도 살짝 묻어났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지안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비 납셨네.
“그럼 저리로 가.” 바나가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안 돼. 자리가 없어.” 지안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은 바나가 왕창 모아 옮겨놓은 두 사람의 짐 더미에 가 있었다. 바나는 약이 잔뜩 올라 콧김을 씨익 뱉으며 지안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지안이 말했다. “니가 하면 되잖아.”
“내가 왜?” 바나가 물었다.
“좋아하면 뽀뽀하는 거라며.” 바나는 그의 말에 반박할 거리를 딱히 찾지 못했는지 애꿎은 화채 속 수박을 쿡쿡 찔렀다.
--- p.242
“괜찮아, 봄은 빨리 끝나니까.”
“이 개 같은 풀내음.” 지안이 짜증 나는 듯 중얼거리자 바나가 칵칵대며 박장대소를 하다가 또 한 번 에취! 하며 크게 재채기를 했다. 그래도 그녀의 입가에는 아직 웃음이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의 연애는 이렇게 살랑거리며 시작되었다. 풀내음 가득한 지안의 맹목적인 사랑에 바나는 재채기를 멈출 수 없었다.
첫사랑이구나. 지안은 웃다가 재채기를 하다가 웃는, ‘예쁜 미소상’을 탔을 것 같은 그녀의 입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니가 내 첫사랑이구나.
--- p.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