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9일, 나는 이태원 참사 현장에 있었다. 참사 직후의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는 지금도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고 어안이 벙벙한 느낌, 현실감각이 소멸된 채 아득하던 기억만 남아 있다. 가슴이 답답해 미칠 듯했던 것만은 또렷하다. 그 심경을 있는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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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사평역에서 세계음식문화거리로 향하는 길은 정말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는데, 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녹사평역 근처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이 저마다 마법사 분장을 하고 소리 지르며 뛰어 놀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해서 꾸민 코스튬도 사랑스러웠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듣는 사람도 덩달아 미소 짓게 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와 사탕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 사탕을 내밀며 수줍게 웃던 그 말간 얼굴과 눈빛도 선명하다. 가족 세 명이 모두 ‘콘헤드 분장’을 하고 몰려다니는 걸 보고 친구와 한참을 웃었던 것도 생각난다. 이소룡도 있고, 디즈니 공주도 있고, 스누피, 백설공주, 신데렐라, 엘사까지 참 다양했는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화영화의 한 장면이 이태원 골목마다 삽입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 p.23~24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성질을 부리고 짜증을 내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귀가 따가워서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 순간 갑자기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1초 만에 전후 상황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등이 아팠다. 그러다 곧 앞쪽에서도 압력이 가해졌다. 앞뒤로 세게 압박이 가해지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몇 초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 p.26
모든 상황을 목격하고 온 사람은 속보를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죽음을 떠올렸고, 바깥 상황을 전혀 보지 못한 우리는 차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떼죽음을, 그것도 사람이 당한다니.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겁을 먹은 친구가 많이 흥분했다고 생각했다.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울먹이는 친구를 다른 친구가 달랬다.
“아니야,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뉴스를 기다리자.”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속보가 뜨기 시작했다.
‘이태원 대규모 압사 사고 발생. 심정지 환자 20명.’
이 속보를 기점으로 심정지 및 사망 환자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며 업데이트됐고, 우리는 말을 잃었다. 외면해왔던, 설마 했던 비극을 현실로 맞닥뜨려야 하는 충격과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내가 본 게 죽은 사람들이 맞잖아’ 하고 느껴버린 친구의 마음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녔다. 애써 부인해온 그 수상한 상황들이 ‘죽음’으로 밝혀지고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졌다. 정신이 나가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 p.37~38
10월 30일 새벽부터 이틀간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뉴스 집착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잠도 자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뉴스만 바라봤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서 전화가 쏟아졌고 아무렇지 않게 “어, 나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동네에 같이 사는 친한 언니가 내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했다. 나는 인지할 수 없는 내 상태를 언니가 대신 인지했다. 진지하게 전화 상담을 권유했다. 언니의 거듭된 설득 끝에 나는 몇 번의 전화 통화 시도를 했다. 전화를 걸다가 그냥 끊어버리는 일을 반복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한 명의 심리 상담사와 연결이 됐다. 상담사는 나더러 ‘생존자’라고 했다. 상담사가 오버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일반인인데요. 난 그렇게 특별한 무언가를 겪지 않았는데요? 몸이 다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고 멀쩡히 숨 쉬고 살아 있는데요? 다만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인걸요. 나는 물었다.
“선생님,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 p.42~43
통화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일을 처음으로 자세하게 털어놓고 내 상태를 내보였던 것뿐이었다. 울면서 상담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아무래도 그날 거기를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너무 후회돼요.”
그리고 이어진 상담사의 대답은 내게 첫 치료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에요. 그날 거기를 가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디를 가도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 맞아요. 놀다가 참사를 당한 게 아니라 일상을 살다가 참사를 당한 겁니다.”
--- p.50~51
나를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빠지게 한 또 다른 요인은 ‘무지’였다. 나는 그날, 무지했다. 어찌 그토록 무지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내 아둔함을 오래도록 치가 떨리게 싫어하고 미워했다. 현장에 있었으면서 어떻게 참사를 인지하지 못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잘도 놀았던 내가 한심했다. 사람이 실려 나가는 데도 죽음과 상관없다고 여기며 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해 나는 끙끙 앓았다. 그날 그 시간에 내가 찍어둔 영상은 내 무지함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나 자신이 징그러웠다. 사람이 뭐에 홀리면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예 모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귀여운 텔레토비친구들에게 꽂혀서 바로 뒤로 사람이 실려 가고 있었음을 몰랐다는 게, 영상을 찍을 당시 그 상황이 내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p.77~78
나는 여전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겪지 않아도 될 일, 겪어서는 안 될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편에 더 가깝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내게 묻는다.
“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이야기에 네가 왜 그렇게까지 힘들어하고 아파하니?”
내 대답은 한 가지다. 나는 그들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날 참사 현장에 있던 사람 중 죽음을 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전히 ‘운’으로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 사실을 나는 여전히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내 삶을 무거운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짊어지고 있다.
--- p.96
“그냥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뻐. 너랑 다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
친구 N은 새해 인사를 핑계 삼아 시간 간격을 두고 이런 문자를 보냈다.
‘뭐해? 그냥 연락해봤어.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참, 시간되면 집에 밥 먹으러 와.’
‘미안해. 너무 뜬금없었지? 새해 핑계로 슥 넘어가 보려고 했어. 모르긴 몰라도 나 같은 애 주변에 많을 거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바로 연락도 못 하고, 미안해. 내가 이렇게 후졌어.’
‘다시 만나서 기쁘다’는 말과 ‘내가 이렇게 후졌어’라는 말이 살아서 ‘다행’이라는 말보다 내 치유에 훨씬 큰 도움을 주었다. ‘좋은 위로’라는 건 뭘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아픈 사람을 알아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들 곁에 함께 서 있는 것도 해줄 수 있다. 나는 기꺼이 그들 곁에 서 있기를 선택할 것이다. 힘을 내도록 그 사람 편이 되어주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 p.101
참사 이후, 나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어른들을 보면서 외로웠다. 나아가 점점 더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드는 것 같았다. 사과받고 싶었다. 나를 대신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희생자들에게는 사과하고 싶었고,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할 줄 모르는 어른들에게는 사과받고 싶었다. 왜 아무도 사과하지 않지? 우리는 이렇게 아픈데. 세상은, 이 시대는, 사과하지 않기 위해 ‘네가 놀다가 죽은 것’이라며 개인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도 진짜 어른을 찾았고, 어른이 된 지금도 진짜 어른을 찾고 있다.
--- p.119
공청회에서는 국회의원을 비롯해 유가족마저 생존자들의 생생한 현장 증언에 모두가 말을 잃어갔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랬구나’ 하고 처음 체감하는 듯하던 그 분위기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보신각 타종 행사를 해도 군중 밀집 관리에 들어가고, 각종 행사와 시위가 있어도 군중 밀집 관리에 들어가 기동대를 배치한다. 그런데 왜 유독 이태원과 그날의 사고 시그널은 놓친 것일까. 나는 우리 사회가 다른 세대에게, 다른 연령대의 인간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없이 세상에 그저 자신이 사는 방식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다양성에 관심이 없고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문제였다. 참사는 그 행사가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인지 몰랐던 무지함의 결과가 아닐까.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나는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 p.176~177
한참 주저앉아 숨을 고르다 일어나서 어찌어찌 발언하고 내려왔는데, 유가족 어머니 중 한 분이 내 앞에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줘서 고마워요. 나는 초롱 씨가 다 잊고 행복하고 밝게만 살아줬으면 좋겠어. 다 잊고 잘 살아줘요. 행복하게만, 응? 요즘 젊은 사람들 사는 것처럼. 그러면 난 정말 바랄 게 없네. 이 이야기 꼭 해주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진상규명도 그냥 우리가 다 할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제 더 울지 말고 씩씩하게 잘 살아줘요. 너무 큰 짐은 다 버려두고 앞으로는 웃고 살 일만 걱정했으면 좋겠네. 그간은 용기를 내주길 바랐는데 오늘 보니 못할 짓이다 싶어. 그냥 젊은 친구들은 원래 살던 대로 밝고 밝게 사는 게, 그게 우리를 위한 것 같아. 그동안 고마웠어요.”
내게 잊어도 된다고 말해준 유일한 분이었다. 다 잊으라는 말이 이렇게도 슬프고 위로를 주다니, 대체 그들과 내게 어떤 슬픔이 존재하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밝게 사는 것이, 평범하게 웃고 지내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라니,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잊어달란 그 요청을 고이 접어두고 사는 내내 꼭 기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p.191~192
초롱아. 나는 아직도 고통에 직면해 그것과 마주하면서도, 고통에 힘겨워하면서도 왜 글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너를 위해 이 글을 쓴다. 아마도 너는 수많은 초롱에게 손을 내미는 것일 테지. 참사에서 아직 구조하지 못한 수많은 초롱을 구조하는 것. 그건 너 자신을 위한 길인 걸 안다.
--- p.243~244
처음 기자를 만난 날, 나는 직업 뒤에 가려진 힘들어하는 한 개인을 목격했다. 그들을 만나며 나는 남들이 내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며 막연히 편견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앞에 앉은 또래 기자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마치 거울로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참사 현장에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없이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넋을 잃고 길바닥에 주저앉은 생존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인터뷰를 해야 하는 잔인한 직업에 종사했다. 현장을 두 눈에 담은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생존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집요하게 물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 미안해서 마이크를 들고 한참을 배회하다가 결국 같이 울었다는 말을 나는 여러 기자에게 들었다. 그들은 인터뷰를 해도 문제, 하지 않아도 문제인 상황에서 상처받았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참사 목격자이자 생존자였다. 트라우마는 그들을 비껴가지 않았다.
--- p.283
태어난 지 4개월밖에 안 된 아기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나는 내내 행복했다. 그리고 눈물 나게 고마웠다. 아기 엄마는 내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반대로 나는 나를 이렇게 세상 무해한 공간으로 불러주어 고맙다고 했다. 아기가 분유를 먹는 모습, 아기 냄새, 아기가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내게 위로를 주었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건 그 자체로 감동인 거구나 싶었다. 그 순간 나도 살아 있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04
그날 나는 인센스 홀더를 하나 얻어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향을 피우며 기도했다.
‘잘 가, 내 고통. 명복을 빈다. 훨훨 날아가렴.’
이상하게도 내 슬픔이 조금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매일 밤 남은 내 슬픔의 명복을 빈다. 이것도 루틴이라면 루틴일까. 분명한 건 첫날보다는 그다음 날이, 그다음 날보다는 또 그다음 날이 슬픔의 총량이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책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책을 쓰는 내내 마음에 향을 피우고 슬픔을 조금씩 멀리 날려 보내는 상상을 했다. 동시에 내게 남은 슬픔의 명복을 빌었다.
--- p.307~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