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오늘부로 완전히 엉망이 될 것 같다. 아니, ‘될 것 같다’가 아니라 ‘되고 말았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어제 나는 내 방을 내놔야 했다. 서른두 평 아파트에 안방은 부모님, 볕이 잘 드는 중간 방은 오빠, 작은방은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았다. 그런데 오늘부터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살게 되었다. 오빠는 고3인 데다 남자라 외할머니와 지내기 불편하다고 나와 방을 바꿔 작은방을 혼자 쓰고, 나는 오빠 방이었던 중간 방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야 한다. 이건 순전히 부모님의 의지로 정해진 거다.
“안 돼요! 나도 이제 중3인데. 프라이빗한 공간이 필요한 나이란 말이에요!”
“이제 겨우 중3이 무슨 프라이빗? 계란 프라이 같은 소리 그만해! 할머니 오시면 네가 책임지고 챙겨드려야 해.”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내 의지는 애초부터 묵살이었다. 내 방을 뺏긴 것도 팔짝 뛸 일인데 엄마는 외할머니까지 챙겨드리란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힐 일 아닌가?
--- pp.7-8
해방되고 처음,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만세를 불렀어. 이제 좋은 세상이 왔다고 서로 껴안고 울며 기뻐했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점점 사람들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어. 빨갱이라는 말이 연기처럼 떠돌며 집집마다 스며들었지. 빨갱이라는 말은 모든 걸 덮을 수 있는 말이었어. 조상 제삿밥을 나눠 먹던 이웃이 언제부턴가 밀고자 되어 이웃을 고발했어. 자기보다 더 많이 배웠다고. 다른 사람보다 잘 산다고.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양식을 빌려준 사람에게 빌린 걸 갚지 않으려 빨갱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였단다.
염치가 살아 있던 사람들은 파렴치한이 되었고 양심은 미움과 증오 앞에 설 자리를 잃어버렸지. 사람들은 환한 대낮에도, 캄캄한 밤중에도 지서로 끌려갔어. 끌려간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죽을 만큼 두들겨 맞고 풀려난 사람은 운이 좋은 경우였어.
--- pp.30-31
북한군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외할머니 말은 내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엄마, 아빠가 학교 다녔을 때는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 같은 것도 있었단다. 북한군을 뿔 달린 도깨비처럼 그리고 ‘때려잡자, 공산당!’ 같은 글도 넣곤 했단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옛날 사람인 할머니는 북한군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 여기셨다니! 요즘 우리는 북한을 같은 민족이지만 우리와 다른 사회주의 국가로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목적에 따라 강요된 생각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들 수도 있구나.
그런데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 다 다르기도 하지. 생긴 모습이 다르고 키나 몸집도 다르지. 저마다 성장 환경이나 사는 환경도 다르지. 다른 모습만큼 생각도 다 다르고.
--- p.75
동네 아이들과 이수는 일수가 가리키는 걸 살피는데 삼수는 눈보다 몸이 먼저 비탈을 내려간 거야. 삼수는 형제들 중에 몸이 제일 빨랐고 성정도 급했거든. 그만큼 욕심도 많아 아버지께 늘 야단맞는 것도 삼수였어.
“야, 그거 내가 먼저 봤으니 내 거다!”
일수가 소리를 질렀는데 삼수는 콧방귀를 뀌더란다.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지!”
삼수는 형이 내려와 뺏기라도 할까 봐 얼른 그걸 주워 들더란다.
맞아! 포탄이었어. 우리 고은이 눈치도 빠르구나.
그런데 포탄을 주워 든다는 게 그만 포탄 뇌관을 뺀 거였어. 빠른 몸과 급한 성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고 만 것이었지.
“쾅!”
소리와 함께 방금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던 삼수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어. 충격으로 일수와 이수, 동네 아이들은 까무러쳤고.
--- p.90
“은비야, 평화의 반대는 뭘까?”
“야! 채고은, 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니?”
“아니야, 내겐 네 대답이 중요해서 물어본 거야. 같이 과제할 거니까 네 생각도 들어봐야지.”
“분쟁! 또는 전쟁이지! 초딩도 그 정도는 대답할 수 있어!”
“그렇지? 그럼, 전쟁은 왜 일어날까?”
“그, 그거야……. 미움과 욕심. 자기 나라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욕심. 뭐…… 그런 거 때문 아닐까?”
은비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생각을 잘 얘기했다.
“그렇겠지? 그런데 지금도 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잖아.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지도자들은 전쟁으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글쎄? 으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그렇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겠지. 그럼, 전쟁은 누구를 위한 걸까? 전쟁으로 나라의 이익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행복이 희생되는 건 옳은 걸까?”
--- p.126
전쟁 중에 어린아이가 죽은 걸 누구에게 따지거나 하소연할 수도 없는 게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북한군이 원수처럼 미운 것도 아니었어. 미운 건 전쟁이었지 사람은 아니었어.
‘적과 싸워야 하는 전쟁이니 총도 쏘고 포탄도 퍼부어야겠지. 그 와중에 애꿎은 사람들도 죽고, 어린아이들도 죽고. 모두 전쟁이 그리 만든 거야!’
‘사람들은 왜 서로 미워할까? 맘대로 오고 가던 길에다 삼팔선인가 뭔가 선 그어놓고 서로 오가지도 못하게 만들더니 이렇게 전쟁까지 일으키고!’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전쟁은 이해가 안 되었어.
‘전쟁은 왜 일어날까?’
‘삼수는 단지 운이 나빠 죽은 것일까?’
‘삼수가 죽은 건 전쟁 중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들.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들고 있는 것 같았지.
--- pp.156-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