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언어가 언중言衆의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책상 위에서 머리 굴리며 결정한 말이 ‘바른말’이라고 생각해. ‘금도襟度를 지킨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야. 국어사전에서 ‘금도’를 찾아보면 ‘남을 받아들일 만한 도량’이라고 풀이돼 있어. 예문으로는 “대인물다운 금도”라는 구절이 올라 있더군.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금도를 지킨다’고 말할 땐 대개 ‘지나침이 없이 절제한다’는 뜻이야. 사실 언중은 ‘금도’를 ‘禁度’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지. 그런데 사전편찬자들은 이런 일상의 용법을 무시해. 사실 사전편찬자가 ‘언어생활의 감시자’가 돼서는 안 되지. 그들은 언어생활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이어야 해.
에릭 시걸은 달리기광이었어. 단거리 장거리를 안 가렸지. 젊은 시절 한 20년간은 해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꼭 참가했어. 고전문학 가르치기, 대중소설과 영화각본 쓰기, 달리기가 그의 삶이었어. 그는 약간 과장하자면 르네상스적 완전인에 가까웠지.
만년에 파킨슨병에 시달리던 그가 죽은 게 앞서 말했듯 불과 5년 전이야. 그때 나는 신문들이, 한국 신문들만이 아니라 외국 신문들까지도, 그에 대한 부고에 너무 인색한 데 놀랐어. 사실 어떤 인물에 대한 어떤 매체의 부고 기사를 보면, 그 매체의 취향만이 아니라 수준을 알 수 있어. 나는 에릭 시걸의 죽음이 조금 더 소란스러웠어야 했다고 생각해. 그냥, 이 글을 에릭 시걸에 대한 뒤늦은 부고로 읽어주기 바라.
어떤 책은 독자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그런 책을 만난 사람이 못 만난 사람보다 더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 예컨대, 올해 들어서야 독일에서 비판적 주석을 붙여 출간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오래전부터 한국에서 해적판으로 나돌았지만, 그 책을 읽고 감명 받아 파시스트가 된 사람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물론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게 책만은 아니지. 스승,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 특이한 경험들, 그밖에도 많겠지. 내 경우는 삶이 책이라는 거푸집을 통해 빚어진 것 같아. 책이 사람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은 독자의 사상이나 이념의 수준에서도 가능하고, 직업의 수준에서도 가능해. 그리고 때때로 그 둘은 서로 길항하기도 하지.
찜찜하지만, 남 험담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네. 한강 씨의 맨부커국제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튿날 한 조간신문에는 이 경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잘 알려진 문학비평가의 글이 실렸어. 그 글 앞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어. “해방 이후 한국 문학은 한글의 우수성에 힘입어 독자적으로 생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한글의 고립성 때문에 유통에 심각한 곤란을 겪어 왔다.” 무슨 말인지들 혹시 이해가 되셔? 나는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한글’이란 도대체 뭘까? 그리고 그 ‘우수성’이란 또 뭘까? 더 나아가 그 ‘고립성’이란 또 뭘까? 앞의 ‘한글’이랑 뒤의 ‘한글’은 같은 뜻일까 다른 뜻일까? 이런 문장은, 과장하자면, 한국어에 대한 테러야. 이런 테러가 다른 사람들도 아닌 문인들의 손을 통해 매일 저질러지고 있어. 김수영 이후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아직 문학 이전에 있어. 아니면 문학을 누락한 채 문학 너머로 날아와버렸는지도 몰라.
인간의 도시가, 세속도시가 순수하게 성스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세속은 거룩함을 배반하게 마련입니다. 속세는 무균실이 아닙니다. 세속도시는 본디 불순하고 불결합니다. 그러나 그 불순함과 불결함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위생처리된 공간은 사실 죽음의 공간입니다. 순수와 청결을 향한 집착은 죽음을 향해 뻗어 있는 레일입니다. 히틀러도 스탈린도 위생처리 전문가였습니다. 그래서 불순함과 불결함을 참아내지 못하고 학살과 억압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제 딴엔 그런 ‘살균작업’을 선이라 여겼습니다. 지선至善에 이르려는 적극적 도덕 말고 악을 줄이려는 소극적 도덕을 실천 강령으로 삼읍시다. 불순한 것이 싱그럽습니다. 불결한 것이 아름답습니다.
남아! 나잇살이나 먹었으면서도 나는 왜 이리 정치에 집착하는지. 누구 말마따나 정치는 정말 한국인의 히스테린가? 내겐 누려도 될, 아니 누려야 할 생의 정당한 사치가 수두룩한데 말이야. 서해 바다의 저녁노을, 몇 걸음의 산책(양재천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몇 마디의 밀어, 몇 모금의 에스프레소, 몇 움큼의 잔모래, 어린 조카들과의 볼뽀뽀, 몇 줄의 시 같은.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젠 그런 정당한 사치를 누리려 애써볼 참이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