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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마다 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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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5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200g | 125*195*10mm
ISBN13 9788979736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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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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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에 어린 삼 남매 쪼르르 누이고 안방인 듯 너른 산정을 차지한 여자. 콧대가 높아 속눈썹을 고압철탑으로 세우고, 볼록한 이마와 풍만한 가슴, 긴 목에 붉은 불빛이 반짝이기도 합니다. 여자의 발끝에 누워 능선인 듯 성곽인 듯 외풍을 막아주는 남자. 우락부락 큰 눈알을 굴리며, 하늘 같은 땅 같은 식솔들을 지킵니다. 사철 한데서 안팎을 초월한 저 장엄한 가족의 신화.

유채와 핑크뮬리와 갈대와 코스모스와 철새들은 모릅니다. 신들이 금정산 뒤편에 살림을 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축제의 바깥에서 물수제비를 뜨거나, 꼬리연을 날리며 별 같은 달 같은 그들을 받아쓰는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생명의 시작이며 완성인 금정산 뒤편은 자주 물안개 피어오르고 설레는 발자국 골골마다 찍고 있는 당신과 나의 뒤편도 서로를 지켜주는 신화입니까.
--- 「권애숙, 금정산 뒤편」

동방의 해 뜨는 나라, 위도나 경도가 어찌됐건
유라시아대륙 관문에서 제일 먼저
해가 뜨는 천성산,

그 옛날 중국에서 온 천명 대중이
해동 원효를 찾아와
원효의 설說한 바 없이 설한 무설법에
들은 바 없이 득도한 천의 성인이 배출된 산정습지
화엄 늪 노천법당에 서면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신라공주 요석이 양산 산막에서 천막을 치고
어린 설총을 안고 원효를 기다렸으나
끝끝내 만나주지 않았던 원효가
바람만 불어도 떠다니는데,

이 산 곳곳 팔십구 암자가 있었다하나
원효암 원적암 미타암 법수암 내원사
청룡이 무지개를 타고 승천했다는 홍룡사폭포
혈수폭포 무지개폭포가 있고
암벽마다 크고 작은 굴窟들이 있는데,

원효가 기거하던 적멸굴은 동학 창시자 수운 최재우가 가부좌를 틀었고 6.25전쟁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못한 빨치산들이 차지해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약탈을 하고 살았던 비밀아지트가 이제
노루 고라니 산짐승들이
제 새끼를 품고 곤히 잠들었을 것인 즉
쉿,

이 산 줄기 아래 달구질로 터를 닦아 대들보 올리고
둥지 튼 윗대 선령들 음우를 받는 사람들
사시사철 이 산을 파먹고 살았다.
--- 「박정애, 천성산千聖山」

쥐오줌풀도
개똥지빠귀도
이름이 있는데

이름이 없다

야간 릿지
자일 풀리는 꿈
어느 절벽 틈에 손끝 밀어넣었는가

나비바위
부채바위
이름 다 버젓한데

얻지 못한 이름
부를 수 없는 아름다움

없어도 그만인 이름
부르지 않아도 있는 바위가 있다
--- 「신정민, 무명바위」

명상에 잠긴 겨울나무
뼈 속까지 파고드는 찬바람에
성자로 서 있다
남문 가는 길목에서 만난
절집 물소리
긴 동안거에 들고
암자는 느릅 바위에 볕살을 일군다
솔숲 들머리 맴도는 까막까치
적막을 물고 오면
고요한 시간의 중심에서
나는 정물화가 된다
산 그림자 끌며 올라온 케이블카
마냥 오르고
또 내려가야 하는 수행길이다

인적 끊긴 산길에
메아리 한 자락 걸리면
골짜기 깨우는 염불소리 깊어가고
고당봉에서 흩날리는 진눈깨비
하염없이 허공을 맴돈다
--- 「정경미, 겨울 금정산」

발아래가 청청 청청
모두 다 신록
정상에 서 있는 내 몸
겹겹마다 청청
푸르디푸른 봄나무 한 그루
춘흥에 못 이겨 신록 신록
여러 이파리 잎맥 속으로
자지러지는 봄물이 청청
숲으로 길이 나고
강물 들고 파도치고
그 길 따라 적석 적석
봄이 걸어가며 신록 신록
적석산 아래 또 적석산
겹겹마다 청청 청청
--- 「최원준, 적석산積石山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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