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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은 웃었다

문학의전당 시인선-378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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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5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80g | 153*224*8mm
ISBN13 9791158966454
ISBN10 115896645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주민등록증이 막 발급됐을 무렵의 수업시간
인왕산으로 쫓겨 올라가던 그들이
내겐 영웅으로 비쳤다
병아리 혓바닥 같은 4월
까마귀들이 에워싼 신촌역 Y대 주변
같은 반 친구들과 가출 소녀들처럼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몇 바퀴 돌다가
검문에 걸려 파출소로 서대문경찰서로 넘겨졌다
집회 장소에 집결하지 못하고 주변만 서성이던
양심은 그래도 히득댔다
자술서엔 고등학교는 졸업해야지 하는
알량한 계산을 적어 넣었다
대학 시절 노래패로 문선대 활동을 하며
시위 대열에 합류하곤 했는데
눈물 콧물 흘리며 따라 뛰다가
까마귀 떼에게 머리통 터지도록 두들겨 맞는 사람을 보며
대열에서 슬쩍 빠져 전철을 타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수감된 친구에게
사식 한번 넣어주지 못했던 미안함도
빠른 결혼과 시어른 모시고 산다는
생활을 무기로 얼버무렸다
지금은 아련한 과거의 일들이지만
여전히 생각 따로 생활 따로
부끄럽긴 마찬가지
뜨겁게 살아 있어야 할 정의나 진실 앞에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며 부끄럽게 위안하는데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언제쯤 하나 될까 싶지만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비겁한 짐승이
내 안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오늘도 핑계를 만들어낸다
--- 「반성 혹은 변명」 전문

드넓은 초원의 풀
마르지 않는 샘
처음도 끝도 없는 길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났고
기차를 타고
아주 떠나버린 안나 카레니나
길안(吉安)에서 택시를 잡아타지 못한 시인 장정일
모터사이클을 타고 혁명의 깃발을 펄럭인 체 게바라
자유로운 영혼 조르바
자기만의 방이 있는 버지니아 울프와
자분자분 함께 걷다 보면
어느새 나는 사막을 걷는 연금술사
겁 없이 바다를 나는 나비
수레바퀴 아래에서
어느 샐러리맨의 죽음을 목격하고
결국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달린다
오늘도 한 송이 장미를 위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내게도 편지를 배달해 주기 바라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뒤적인다
--- 「도서관에서」 전문

꽃을 보려고
풀을 뽑는다

연지곤지 바른 광대나물
햇님 따라 노랗게 웃는 괭이밥
살랑살랑 실바람에 낭창거리는 냉이꽃
하늘하늘 꽃마리
무더기로 꽃을 피운다

꽃을 보려고
꽃을 뽑는다

뿌리째 뽑혀 나가는
잡꽃들

머리채가 휘감겨 들려지는 나
--- 「꽃」 전문

사랑에 대한 달콤한 말은
아름다운 옷을 입지만
때론 바꿔 입기도 벗어버리기도 한다

아버지는 한 여자를 위해 모두를 버렸고
어머니는 돌도 안 된 젖먹이를 두고 모성을 버렸다
다행히 할머니가 책임을 떠안으셨는데

몸져누운 할머니의 병시중을 들며
죽음까지 보게 된 초등학교 6학년
너무 어리고 철없어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나쁜 마음을 먹기도 했는데
그것이 죄스러워 무딘 칼로 손목을 긋기도 했다

별들이 무더기로 떨어진 지 1년
참사 1주기 추모식이 끝나고
대형 스크린에 차례차례 올라온 앳된 얼굴들
웃고 있는 꽃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진상규명도 재발방지대책도 책임자 처벌도
국가는 어느 것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으니
사랑이 아니다

이불 밑 활갯짓 분노밖에 할 수 없는
미안한 마음 담아
159개의 조화(弔花)를 보내며

꽃들의 명복(冥福)을 빈다
--- 「웃고 있는 꽃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전문

할아버지 87세
할머니 82세
오늘도 나란히 배드민턴장으로 오신다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이
오다리로 오신다

반 백년 넘어 한 백년 향한 부부의 랠리

톡, 탁! 톡, 탁!

힘주어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잘 받아내고 잘 쳐올리라고
셔틀콕 깃털처럼 가볍게
힘 빼며 친다

간간이 들리는 추임새가 아침을 연다
--- 「오랜 사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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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경의 시는 서정(抒情)이라는 바탕 위에 쌓아 올린 유리성 같다. 자연을 자연이라고 말하고, 사람을 사람이라고 있는 그대로 말한다. 꾸밈이 없다. 언어를 비틀지도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깊다. 너무 깊어서 오히려 투명하다. 그 투명의 힘으로 불화를 꿈꾸지만, 그것은 시인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불화하는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그래서 오늘은 웃었다」)라는 진술에서 보듯이 낙천적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불의와 타협하지는 않는다. 강수경은 “영정도 위패도 없는 거짓분향소/조문도 조의도 없는 검정 리본”(「우리 심장은 아직, 뜨겁습니다」)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뜨거운 이성의 소유자이자, 탈탈 털려버리기만 하고 “맥없이 끝나버린 화상 면접”(「콤프레샤」)에 좌절하는 소시민이기도 하다. “꽃을 보려고/꽃을 뽑는”(「꽃」) 아둔한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강수경의 자세야말로 진짜 시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고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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