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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버려둬 (큰글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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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5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32쪽 | 210*290*16mm
ISBN13 9791192964973
ISBN10 1192964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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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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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도시는 궤도의 밭이었다. 전후좌우는 물론 위와 아래에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거대한 궤도뿐이다. 궤도는 도시의 건물이며 산이며 길이고 빛이며 밥이었다. 궤도는 검고, 레일에 잠긴 톱니바퀴들엔 회색빛이 감돌았다. 그 회색들 속에서 레일 곳곳에 촘촘히 박혀 있는 검은 안장과 체인과 페달이 반짝거렸다. 이 도시엔 몇 개의 궤도가 존재하고 몇 개의 페달이 돌아가고 있을까.
--- 「프롤로그_ 풍문이 사실이라면」중에서

첫 번째 사이렌이 울었다. 발바닥에 고여 있던 긴장이 빠져나갔다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가슴에 맺혀있던 땀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뭔가 변한 듯한데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바람에 실린 쇳내와 모빌유의 달콤한 냄새도 여전했고 톱니들의 신음 또한 그대로였다. 검은 하늘을 향해 뻗은 마스터 방의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어긋난 데라곤 없는데 발바닥에 고여 있던 긴장이 사라지는 느낌이 달랐다.
그 미세한 차이를 인식하기도 전에 두 번째 사이렌이 울었다. 1200단위 구역의 작업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 「Ⅰ.오류들_ 궤도에서 궤도로」중에서

페달을 돌리다 보면 어느 순간 페달러들의 힘이 톱니를 타고 미세하게 전달되었다. 그 힘 속에서 슬픔이나 아픔 고통이 느껴지기도 했고 가끔 기쁨이나 행복이 전달되기도 했다. 페달러들은 하나의 몸에서 뻗어 나간 근육이나 신경들과 비슷했다. 페달을 밟으며 호흡의 리듬도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고 페달이 어느 지점을 지날 때 힘을 주어야 하는지도 닮아갔다. 내 발의 오른쪽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면 그 힘이 마지막 자리의 페달러에게까지 전달되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는 똑같은 근육을 사용했고 비슷한 힘으로 페달을 밟았다. 닮지 않으려 해도 닮을 수밖에.
--- 「Ⅰ.오류들_ 질문과 심문」중에서

히로의 집 문의 비밀번호는 단순했다. 그의 궤도 넘버였다. ‘1212-50’은 그처럼 단순한 인간이었다. 분명한 목표를 좋아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았다. 그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순수한 인간은 자살 따위는 하지 않을 터였다. 아니 순수한 인간이라 다른 페달러들보다 죽는다는 사실에 쉽게 전염되는 것일까. 나는 금방 나의 가정이 편협하다는 걸 인정했다. 누구든 스스로 죽을 수 있었다. 순수한 인간이든 타락한 인간이든.
--- 「Ⅰ.오류들_ 흔적」중에서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1212궤도의 위용은 위압적이었다. 도시의 핵심은 1200급 궤도였다. 1200궤도가 돌지 못하면 도시는 암흑과 다를 바 없었다. 다른 단위의 궤도들은 관공서 정도에 전기와 물을 공급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1200급 궤도가 돌아야 비로소 지하에서 흐르는 물을 끌어올리고 거리의 등을 밝히고 집안의 전기를 공급했다. 1200급 궤도가 돌아야 병원도 학교도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었다. 그 1200급 궤도들 가운데 1212궤도는 페달과 톱니의 크기가 가장 컸다. 1212궤도 하나만으로도 도시 전체의 전등에 불을 밝힐 수 있었다.
--- 「Ⅱ.또 다른 오류들_ 낯설면서도 신선한」중에서

나는 그 말에는 대꾸할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그녀나 내가 궁금해하는 사실들이 밝혀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망상에 가까운 기억들의 실체나 진실 따위를 밝혀낼 수 있을 거라 믿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의 무의식은 자꾸만 궤도를 떠나게 했다.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흘러왔다. 문이 열리면 이 세상과 완전한 이별이 될지도 몰랐다. 살아남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몸과 마음은 알지도 못하는 세상을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심장이 델 정도였다.
--- 「Ⅱ.또 다른 오류들_ 단순한 반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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