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하다는 교수가 강단에 서고 지역 인사들과 강당을 가득 메운 수강생들이 교수님의 강의에 젖어 드는 시간, 십여 분을 버티던 내 의식은 가물가물 무아경을 향해 눈을 감는다. 그런 순간 환호와 박수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꼭… “라고…” 하는 인용사가 귀청을 울려댔다. 무슨 내용을 들었는지 기억에도 안 남는다. 그럼에도 남는 “라고…”라는 언어…, 나보다 나이 어린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석 달을 한 주일에 두 시간씩 여러 강사님께 배운 강의 중에 이 ‘라고’가 가장 인상적인 언어였다.
“숨소리 죽인 아낙들의 거룩한 시선을 받으며/ 유창한 생의 경전을 읊는 교수님 말씀이/ 밤잠 설친 내 귓전에는/ 졸음을 부르는 최면처럼 달콤해/ 깜빡깜빡 눈꺼풀이 보초를 서는 초복날// 하필이면 교수님 말씀 중간중간/ 걸어 나와 한 옥타브 높인/ …라고,/ …라고,/ 인용어를 강조하는 소리만 주워들은/ 知天命 도로아미타불의 공염불”(- 시 「…라고만 남아서」 중에서, 시집 『우리 집 마당은 누가 주인일까』(2005))
---pp.71~72 「2부 ‘…라고만 남아서’」 중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별이 된 아가야,/ 한 번이라도 좋으니 생시처럼 만나/ 내 손으로 따듯한 밥 한 그릇 먹여 봤으면/ 꿈자리마다 보고 싶은 비몽사몽간에도/ 야속해라 허무해라 애만 타는 나날들/ 할미 곁 떠난 지 반년이 지나도/ 지구별 찾지 못해 못 오시는가,/ 아픈 몸 더 아파서 못 오시는가,/ 무연히 눈뜨는 아침마다/ 허망한 애상에 젖는 할미 마음”(- 시 「하룻밤 꿈에라도」 중에서, 시집 『아기별과 할미꽃』(2019))
이별과의 동행이 사람 사는 길 위의 여정이다. 요즘 들어 부쩍 죽음에 대한 상념이 깊어졌다. 사상가도 아니고 염세주의자도 아닌 나에게 과연 예고 없는 죽음이 왔을 때 어떤 모습으로 가야 할지 또는 가게 될지 전혀 모른다.
칠십을 살면서 보고 겪은 인간사의 애환 중에 가장 힘든 일이 가족과의 이별이다. 부모님도 시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신 지 오래다. 하늘이 주신 천수를 다 누리신 세 분 시부모님은 임종도 지켜보고 산소에 하관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친정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돌아가신 후 뵈었다. 그래서 옛말에 ‘임종 자식은 따로 있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자식으로 부모님을 보내드리는 마음은 비통하고 가슴 아프지만 하늘의 뜻이려니 하는 마음이 위안을 준다.
그러나 자식을 가슴에 묻는 부모의 심정은 억장이 무너진다고 표현한다. 내리사랑이란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보내는 애정이며 내가 보듬고 애지중지하는 자식이나 손자녀에게 쓰는 말이다. 윗사랑이란 없다. 좋아하고 존경과 따름이 혹은 우러러봄이 최상의 대우다. 내리사랑이 꿈이었나, 할미를 버리고 간 천사 아이는 아니, 그 아이는 전생 수천 억겁을 건너 우리 가족으로 온, 찰나에 불과한 이승의 여린 꽃봉오리였다. 여덟 살 어린아이가 맞이한 첫 초등학교 입학식은 아이의 선천적 장애와 또래와 다름을 공개하는 자리였다.
입학식에 동반한 할미 마음도 이렇게 불안한데 장애를 지닌 어린 손녀는 또래의 친구들을 보면서 불안을 온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집과 어린이집을 제외한 사회생활의 시작이 어린것에겐 극심한 두려움이었다. 그 나이에 새로 시작할 세상의 모든 행위는 어린 가슴을 압박하는 또 다른 공포심이다. 천재성을 지닌 아이의 두뇌가, 병원 문턱을 닳도록 드나든 아이가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초인적 용기였을 터. 아이는 공포심을 이기지 못했다.
---pp.181~183 「하룻밤 꿈에라도」 중에서
지금도 오래된 종가나 이름난 고택의 곳간에는 뒤주라고 불리는 궤가 유물처럼 하나씩은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농촌마을 집안에 쌀뒤주가 있는 집은 부잣집이었다. 농사를 지어 두어 가마쯤 들어가는 뒤주에 쟁여놓은 흰쌀, 부잣집 아낙들은 한 해의 양식을 뒤주와 독에 보관하고 곳간 열쇠를 간수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 뒤주를 대물림할 때는 집안에 새 며느리가 들어오고 시어머니의 믿음이 며느리에게 전해져야 곳간의 열쇠를 넘겨주는 고부간 신뢰의 상징이었다.
우리 마을에 도시가스가 설치되기 몇 년 전 석유파동이 심해지자 정부에서 목재를 때는 보일러로 설치하면 혜택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석유 난방비에 겨울에는 찬바람이 불던 우리 집이 정부에서 권장한 나무보일러를 놓고 나서 땔감을 얻는 과정에서 시 한 편을 건졌다.
문명의 발달이 농촌지역까지 혜택을 베풀면서 우리 집도 난방과 취사를 모두 도시가스로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단 하나뿐인 지구별이 자꾸 신음하고 지구별에 뿌리를 둔 생들이 아프다. 문명과 문화라는 미명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즐기는 대가가 코로나 역병이 창궐하는 지구촌의 비극으로 되돌려 받는 현실이다. 작금이기도 하다.
“어른들 손때가 묻어/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던 쌀뒤주를/ 육촌 형님이 우리 집 아궁이 땔감용으로 주셨다// 뿌옇게 먼지 쓴 하세월의 부질없음이/ 겹겹이 쌓인 몸피 쌀 두 가마쯤은/ 너끈히 품었을 텅 빈 뒤주 안/ 얼룩진 창호 벽을 노린재 두 마리 유영 중이다// 시숙님 어릴 때 솜씨 좋은 할아버지가/ 아름드리 느티나무 베어다 직접 짜셨다는 뒤주/ 한 가족의 호구지책에 기꺼이 몸 바친 나이테가/ 한 줌 다비식으로 열반에 들 운명이다// 오래전 두랭이댁으로 불린/ 퇴락한 양반 가문 대청마루에서/ 달그락 자물쇠 열리면/ 아이들이 뼈를 세우던 전성기/ 배부른 노래에 신주처럼 위하던 대접도 있었지만// 꼭 닫힌 수십 년의 적막강산, 침묵으로 깔려있어/ 한 겹 바람조차 통과를 거부하는 밀봉의 사연들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 불멸의 궤적으로 읽고 있다”(- 시 「느티나무 뒤주」, 시집 『울음소리가 희망이다』(2005))
육촌 형님이 주신 땔감이 놀랍게도 우리 집안의 종가인 두랭이댁 큰댁에서 온 뒤주였다. 내 아이들의 고조할아버지가 느티나무를 베어다 짜셨다는 뒤주, 차마 어른들 생각에 버릴 수가 없었다는 뒤주가 땔감으로 사라지는 시대에 온갖 감회가 새로웠다. 나도 차마 어른들 손때가 묻은 뒤주를 부수어 땔감으로 사용할 수는 없어서 광주문화원에 기증하고 나서 시원섭섭하다는 말로 위안을 삼았다. ‘통덕랑공’ 문중의 큰 집안인 큰댁은 형님과 장조카가 별세하신 후 외로운 고택으로 변신했다. 마을에서도 통덕랑공 문중 하면 가장 우애 있고 품위 있는 집안이었다고 하시던 시어머님도 홀로되신 황새울 형님도 고만고만한 연세로 황천길 동무하시듯 하늘길에 오르셨다. 어른들 손때 묻은 뒤주 한 궤만 문화원 박물관에서 빛 보는 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pp.206~208 「느티나무 뒤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