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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객잔 (큰글자책)

단풍객잔 (큰글자책)

: 김명리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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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354쪽 | 210*297*30mm
ISBN13 9791159059001
ISBN10 1159059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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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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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저녁 대문간의 불두화 활짝 피어난 때에 엄마가 돌아오셨다. 산골집 적막해서 못 살겠다며 서울 사는 동생네 다니러 가셔서는 거기 눌러앉으신 지 얼마 만인가.
그 사이 지병은 더 깊어져서 지팡이 짚고 부축해 드려도 기우뚱 진동걸음. 여기가 어디냐고 자꾸만 물어보시는 여든넷, 살아온 기억의 거개가 유실되었지만 꽃과 나무와 새와 구름, 해와 달과 바람의 기억만은 유현(幽顯)해서 불두화 꽃그늘에 기대앉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시기도 한다.
그러니 “노인들이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생의 승리”라는 마르케스의 말은 옳다. 여덟 해째 진행성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지만 아직은 당신의 자식들, 손주들 또렷이 알아보시고 사계(四季)의 저마다 다른 바람소리, 봄 나비 떼 같은 심금心琴의 기억들만은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해 보인다.
맞다, 자기 보물을 어디에 숨겼는지 잊어버리는 노인은 없다. 놀라워라, 치매에 드신 우리 엄마, 즐겨 부르시던 노랫말만큼은 한 소절도 잊지 않으셨구나!
--- 「울 엄마 오셨네!」 중에서

아침놀이 번지는 꽃밭
봄 마당의 꽃들 중에는
분통을 터뜨리듯이 피는 꽃

참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듯이 피는 꽃도 있다

꽃샘바람 잎샘바람
이제는 다 물러난 것 같은
오월 해당화 붉은 꽃등 곁에

팔순의 어머니
주름진 눈가에
가물가물 분홍 물살 이는데

울지 말아라 아프지 말아라

오래오래 허공을 쓸어내리다가

잠잠히
어둠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피는 꽃도 있다
--- 「꽃밭의 시학」 중에서

시마(詩魔)에 들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첫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1988년)를 내던 무렵의 몇 달 동안과 세 번째 시집 『적멸의 즐거움』(1999년)을 출간하기 전의 한두 계절 동안을 누군가가 불러주는 듯이, 마치 안에서 뿜어져 나오듯이 하루에도 예닐곱 편 이상의 시를 내리닫이로 썼었던 것 같다.
출판사에 시집 원고를 넘기고 공판인쇄에 들어간 중에도 수십 편의 시를 교체하는 극성을 떨기도 했으니, 이제 와 돌아보면 썩 변변치도 않은 시들을 두고 시마니 뭐니 입설에 올린 일이 스스로 부끄럽기만 하다.
하기사 시마도 늙어 사람의 집 문간에 걸터앉아 숨 고르기만을 하고 있는지 요사이는 그때의 신열 오르던 순간들, 한 구절, 한 구절 받아 적기에도 벅찼던 순간들이 매오로시 그립기만 한 것을.
--- 「시마(詩魔)」 중에서

양광(陽光)은 등에 따갑고 그늘 쪽은 어느새 스산하다. 햇빛과 그늘의 스미고 흩어지는 경계,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좀 더 오래 머뭇거려도 좋을 시기가 이즈음인 듯하다.
여름내 재재발랐던 빛의 걸음걸이가 슬슬 굼떠지기 시작하고 큼큼거리면 코끝에 바짝 당겨올 햇빛, 그늘, 가을꽃 향기.
해묵은 노트를 열고 「오늘 밤에 만난 가을」을 다시 읽는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찍이 가을을 두고 “여름이 타고 남은 것”,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燈籠), 그리고 코스모스 무참”이라고 썼다.
심은 적 없는 마당가 쑥부쟁이 보랏빛 꽃들 아래 한 마리 새의 주검…… 적막한 천지간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실려 왔나, 꽃들아, 새야, 문상 온 나비야.
--- 「곧 가을이 오리라」 중에서

해발 1,650m 담푸스Dampus에 올랐다.
날씨 흐린 탓에 마차푸차레며 안나푸르나 1봉(峰)의 선명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깎아지른 바위 벼랑에 초막(草幕)을 짓고 사는 이들의 풀잎 닮은 웃음, 굵게 팬 주름고랑마다 햇빛이 물살처럼 반짝이며 흘러가는 것을 본다.
도시가 세워지고 교역이 오가고 문명이 꽃피고 큰 바람에 업혀온 작은 바람이 눈앞에 가득한가 했더니 멀리 아득히 어느새 흩어지고 없다.
산이 그곳에 있으니 시절 인연을 옮겨 다니며 사람이, 바위가, 초목이, 하늬바람이 거기에 포자처럼 깃들여 살았으리라.
--- 「담푸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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