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세 번째 제자의 선택이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첫 번째 제자가 다스리기로 한 미래에는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죠, 게다가 두 번째 제자가 다스리기로 한 과거에는 지금까지 겪어 온 귀중한 경험들이 있고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과거로부터의 배움. 이 2가지는 현재를 살아가는데 너무도 중요한 것들이에요.” 달러구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페니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잠든 시간은 어떤가요?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죠. 그저 가만히 누워 시간을 보낼 뿐이에요. 말이 좋아 휴식이지, 실제로는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인생을 통틀어 몇십 년을 누워지내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말이죠, 시간의 신은 가장 총애하던 세 번째 제자에게 ‘잠든 시간’을 맡겼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자는 동안 꿈을 꾸게 하라고 했죠. 왜 그랬을까요?”
페니는 질문하는 척하면서 잠깐 뜸을 들이고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저는 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이 질문을 떠올려요. ‘사람은 왜 잠을 자고 꿈을 꾸는가?’ 그건 바로,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리석기 때문이에요. 첫 번째 제자처럼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든, 두 번째 제자처럼 과거에만 연연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신은 세 번째 제자에게 잠든 시간을 맡겨서 그들을 돕게 한 거예요. 왜, 푹 자는 것만으로도 어제의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고, 오늘을 살아갈 힘이 생길 때가 있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꿈을 꾸지 않고 푹 자든, 여기 이 백화점에서 파는 좋은 꿈을 꾸든, 저마다 잠든 시간을 이용해서 어제를 정리하고 내일은 준비할 수 있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잠든 시간도 더는 쓸모없는 시간이 아니게 되죠.”
---「프롤로그. 3번째 제자의 유서 깊은 가게」중에서
1층에는 아주 고가의 인기상품, 또는 한정판, 예약상품들만을 소량 취급하는 데 반해 2층은 좀 더 보편적인 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2층은 일명 ‘평범한 일상’ 코너로, 소소한 여행이나 친구를 만나는 꿈, 또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 등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페니가 서 있는 계단 바로 앞쪽에는 ‘추억 코너’라는 팻말이 붙은 진열장이 있었다. 진열장 안에는 고급스러운 가죽 케이스로 포장된 케이스에는 ‘개봉 시 환불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꿈 몇 개만이 남아 있었다.
상품을 구경하던 손님이 지나가던 2층 직원을 불러 물었다. “이 꿈은 뭐죠?”
“그건 어린 시절의 추억이에요. 좋아하는 추억들 중의 하나가 꿈에 나온답니다. 어떤 분이 꾸시는지에 따라서 내용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어요. 제 경우에는 어머니 무릎을 베고 귀 청소를 받는 꿈이었죠. 어머니의 향기와 나른한 감각까지. 훌륭한 꿈이었습니다.” 직원이 허공을 응시하며 꿈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것 주세요. 여러 개 사도되나요?”
“그럼요, 많은 손님께서 하룻밤에 2~3개씩은 가져가신답니다.”
페니는 까치발을 들고 층 전체를 둘러봤다. 이 층의 매니저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모던한 침실처럼 꾸며진 구석의 코너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페니는 그들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가갔다. 매니저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허리춤에 앞치마를 두르고 숫자 ‘2’가 각인된 은빛 브로치를 달고 있는 다른 직원들과 다르게, 한 남자만 고급 재킷을 차려입고 가슴에 브로치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단 있고 야무진 인상을 풍겼다.
“왜 못 사게 하는 거예요?”
매니저와 얘기를 나누던 젊은 남자 손님은 당황해서 따져 묻고 있었다.
“지금 잡생각이 많으신 것 같은데 꿈은 다음에 구입하시는 게 어떨까요? 꿈의 선명도가 떨어진답니다. 이럴 때는 그냥 숙면하시는 게 좋죠.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 경험상 손님의 경우에는 99% 꿈을 꾸는 도중에도 잡생각이 끼어들거든요. 전혀 다른 내용이 되어버려요. 옆 골목에서 파는 양파 우유가 굉장히 고소하답니다. 숙면에도 도움이 되지요. 드시고 푹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남자 손님은 꿍얼거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버렸다.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는 손님이 놓고 간 꿈 상자를 집어서 손수건으로 살짝 문지르더니 각을 맞춰 진열장에 다시 올려놓았다.
---「1.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중에서
그때 가게 출입문에 달아놓은 종이 울리고, 나이가 지긋한 손님 1명이 들어왔다.
“죄송해요, 오늘 전 상품 매진이어서….” 페니가 손님에게 말하자 달러구트가 잠깐 기다려보라는 듯 페니 앞으로 나섰다.
“저… 상품을 사려는 건 아니고요. 혹시 예약 상담은 가능한가요?”
“그럼요. 어서 오세요, 손님.”
달러구트는 과자 봉지를 살짝 뒤로 숨기고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그 손님 뒤로도 몇 명의 손님이 더 들어왔다. 달러구트가 맞이한 손님들은 다들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이었는데, 모두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잠들기 전에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페니가 손님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달러구트에게 속삭였다.
“그러게 말이다. 모두 얼굴을 아는 손님들이란다. 평소보다 아주 늦게 오셨어.”
“잠 못 들고 오래 뒤척이다가 오셨나 봐요.”
“그런 것 같구나.”
달러구트는 가게 입구 오른쪽에 위치한 직원용 휴게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페니도 따라갔다. 달러구트는 페니가 따라오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삐걱거리는 아치형 문을 열자 꽤 넓은 방이 나왔다. 샹들리에라고 하기에는 소박한 형태의 조명이 휴게실 안을 아늑하게 비췄다. 군데군데 천을 덧대어 기운 흔적이 있는 낡은 쿠션과 푹신한 의자와 소파, 그리고 나무 하나를 통째로 잘라 만든 기다란 탁자가 있었다. 오래된 냉장고와 커피 머신, 심지어 간식 바구니까지 있어서 나름대로 구색이 갖추어져 있었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자 달러구트가 간식 바구니에서 작은 사탕을 한 움큼 집어 그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숙면 사탕이에요. 맛도 좋고 효과도 좋죠. 오늘 같은 밤에는 푹 자는 게 최고랍니다.”
그들은 사탕을 하나씩 받아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심신 안정용 쿠키부터 드릴 걸 그랬군요. 괜찮습니다. 울어도 괜찮아요. 여기에서의 일은 새어나가지 않으니까요. 자, 제가 어떤 꿈을 준비해 드리면 될까요?”
---「1.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중에서
아가냅 코코라면 연말 꿈 시상식에서 그랑프리를 10번도 넘게 수상한, 일명 전설의 꿈 제작자 중 한 명 이였다. 그녀는 ‘태몽’을 만드는 유일한 꿈 제작자였는데,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온 유명 인사였다. 모그베리의 말처럼 페니는 잡지나 텔레비전에서 그녀를 봤을 뿐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자, 자, 다들 거기까지 하고 이제 퇴근할 사람들은 퇴근하도록 하지. 이것 참, 일이 너무 커졌군.”
사무실에 있는 줄 알았던 달러구트가 산더미 같은 빈 상자들 사이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평소 즐겨 입던 셔츠와 카디건 대신 작업용 점퍼를 입고 있었다. 넉넉한 옷을 입고 있으니 평소보다 더 말라 보였다.
“계속 여기 계셨던 거예요?” 페니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상자들을 치워주었다.
“아가냅 코코를 위해 로비를 장식하자고 한 게 내 아이디어였어. 가짜 과일 몇 개만 입구에 달아놓을까 했는데 일이 이렇게 커졌지 뭐냐. 자자, 다들 퇴근하세요. 퇴근!” 달러구트는 허리가 뻐근한지 꼬리뼈 쪽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런데 퇴근하라는 그의 말에도 직원들은 아무 미동이 없었다. 미동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를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돌처럼 굳어있었다.
페니는 그들의 시선이 멈춰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문밖에 서 있는 자그마한 할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수행원들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오려던 참이었다.
페니는 사람들이 왜 돌처럼 굳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작고 왜소한 아가냅 코코가 뿜어내는 기운은 말문을 막히게 했다. 신비롭고 이상한 기운은 마치 그녀 주위에서만 시간이 거꾸로 갔다 빠르게 흘렀다 하는 것 같았다. 모든 동작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는데 정신을 차리니 그녀는 이미 가게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가냅! 잘 지냈나?” 달러구트가 그녀를 반겼다.
“나의 오랜 친구. 작년 정기회의 때 보고 처음 보는군. 오, 과일 향기! 가게 분위기가 정말… 황홀하군.” 코코가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들을 보고 감탄했다.
달러구트는 흙먼지가 묻은 손으로 아가냅 코코와 악수했다.
다른 직원들은 아가냅 코코를 보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감격했다. 정신없이 날던 레프라혼 요정들조차 공중에 가만히 떠 있었다.
운 좋게 그들 가까이에 서 있던 페니는, 아가냅 코코에게서 과일 풋내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건 장식한 과일들의 냄새보다 더 진하고 풍부한 냄새였다. 그리고 아주 포근한 인상과 얼굴 곳곳의 깊은 주름과 대비되는 통통하고 발그레한 볼살은 마치 뽀얀 아기의 그것과 같았다.
뒤이어 가게 안으로 들어온 수행원들은 고급 비단 보자기로 싼 꾸러미들을 양손에 묵직하게 들고 있었다.
“달러구트, 약속한 물건이야. 별 볼 일 없는 물건이지만 잘 팔아줘,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3. 미래를 보여 드립니다.」중에서
지금 페니는 첫 번째 제자의 후손과 세 번째 제자의 후손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역사적인 현장에 있을 뿐만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예지몽이 가득한 놀라운 현장에 있는 셈이었다. 페니는 신비로운 동화 속 한 장면에 비집고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예지몽일까? 저것만 있으면 나도 내 앞날을 볼 수 있는 걸까?’
페니는 입을 헤 벌리고 이름 모를 미래의 남편감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벌써 가려고? 이거 섭섭해서 어쩌나.” 페니의 상념을 깨트린 것은 달러구트의 풀죽은 목소리였다.
“내 꿈을 기다리는 부부들이 많아. 부지런히 일해야지. 몇 달 뒤면 정기총회가 있을 테니 그때 보도록 하지, 아무튼 반가웠네! 달러구트. 그리고 고마워요, 직원분들. 이 늙은이 때문에 아무래도 고생을 한 것 같군요.” 아가냅 코코가 주렁주렁 달린 과일 장식들과 땀에 전 직원들을 번갈아 보며 미소 지었다. 직원들은 전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럼 과일이라도 가져가게. 담아줄 테니 가져가서 먹도록 해.”
달러구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코코의 수행원들이 과일 장식을 떼내어 박스에 차곡차곡 담았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박스째로 과일을 건네주었으면 바닥 더러워질 일도 없고 얼마나 좋아.” 2층의 비고 마이어스가 복숭아 즙이 묻어 진득해진 손바닥을 손수건에 닦으면서 중얼거렸다.
아가냅 코코와 수행원이 돌아간 뒤, 2층 직원들의 대활약으로 로비는 순식간에 원래의 깔끔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들은 개운한 표정으로 2층으로 돌아갔다.
달러구트는 아가냅 코코가 두고 간 꾸러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머지 직원들을 겨우 돌려보내고, 웨더 아주머니와 페니는 함께 꾸러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봐도 봐도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너도 이 꿈이 탐나는 모양이구나?”
“오, 아주머니. 당연하죠! 사람이라면 모두 그럴 거예요!” 페니는 살짝 흥분해서 큰소리를 냈다.
그들은 꾸러미에서 꺼낸 꿈 상자들을 비어 있는 판매대로 옮겼다. 그리고 페니가 종이에 또박또박 글씨를 써서 붙이는 것으로 판매 준비를 마쳤다.
‘예지몽’ 한정 수량 입고되었습니다.
---「3. 미래를 보여 드립니다.」중에서
수학 시험지의 숫자들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교탁 앞에 세워놓은 커다란 시계는 속절없이 시험 종료 시각을 향해 치닫는다. 시계 초침이 여자의 귓속에서 돌아가는 듯 크고 째깍째깍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여자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손톱을 까득까득 물어뜯었다.
‘이번 시험을 망치면 부모님이 실망하실 거야.’
‘수학 선생님이 내 0점짜리 시험지를 보면 교무실로 부르시겠지.’
‘친구들이 쉬는 시간에 나한테 정답을 물어보러 왔다가, 내 오답투성이 시험지를 보면 뭐라고 할까?’
여자는 이번 시험만큼 인생에 중요한 건 없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비정상적인 수준의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머리를 쿵쿵 울리면서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순간, 햇빛 쨍쨍하던 교실이 삽시간에 그늘로 어두워졌다. 그리고 열려 있는 교실 창문을 통해 운동장에서부터 일어난 커다란 파도가 들어오더니, 이내 교실을 완전히 덮쳐버렸다.
꿈속의 여자는 파도가 몸을 덮치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걸로 이번 시험은 무효가 되겠구나. 아, 다행이다.’
---「4. 환불 요청 대소동」중에서
자신만만하던 페니는 30분도 지나지 않아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남자 손님 한 명이 페니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건물 전체를 돌아봐도 찾는 꿈이 없다며, 페니를 붙잡고 한참을 실랑이했다. 하필이면 웨더 아주머니는 볼 일이 길어지는지 돌아오지 않고, 달러구트는 꿈 제작자를 만나러 외근을 나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페니는 입사 이래 최고로 곤란한 상태였다.
“그런 꿈은 없어요, 손님.”
“그러지 마시고 제발, 저한테도 ‘영감을 얻는 꿈’을 주세요. 전 정말 그 꿈이 필요해요.”
청년은 초췌한 행색으로 애원했다. 그는 영양 섭취가 부족한지 피부도 거칠고 머리도 푸석했다. 그나마 뭔가를 강렬하게 원하는 강한 눈빛만이 겨우겨우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비틀스의 일화와 케쿨레의 벤젠고리 이야기를 보고 왔다니까요. 꿈에서 영감을 얻었다던데, 저한테는 그런 꿈을 파실 수 없는 건가요? 값이 비싸서 그런가요?”
“비틀스가 뭐죠? 벤젠고리는 또 뭐고요? 그리고 값은 어차피 후불이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손님에게 꿈을 팔지 않는 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손님.”
페니는 아무리 가게의 브로슈어를 뒤적여 봐도 ‘영감을 얻는 꿈’ 같은 건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꿈이 있는 걸까? 페니는 고민하다가 내선 전화를 걸어 각층의 매니저를 불러 모았다.
---「7. 비틀즈와 벤젠고리」중에서
꿈속의 남자는 좁은 단칸방에 있었다. 잠을 못 자서 피곤했고, 창작의 고통으로 짓무른 머릿속이 깨질 듯 아팠다. 좁아터진 방 안. 고물 컴퓨터에 어울리지 않는 고사양 프로그램을 돌리느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윙윙거리는 컴퓨터. 마음이 답답해진 그는 작업하던 프로그램을 전부 닫아버린다.
기본적인 것들이 턱없이 부족한 생활 속에서, 돈이나 명예에 대한 큰 욕심은 머릿속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저 곡을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데 온 신경이 집중되어있다.
꿈속의 남자는 방충망까지 전부 열어젖히고 필사적으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른 눈가를 세게 문지른다.
근처의 대단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남자의 집이 위치한 골목 모퉁이를 지나고 있었다.
“응, 나 지금 출근 중이지. 오늘 끝나고 만날까? 금요일이잖아.”
그리고 전화 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직장인, 그건 자기 자신이었지만 꿈속의 남자는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있다는 자괴감, 근황을 묻는 친구들의 연락을 피하게 되는 못난 마음,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 찬 나날이 꿈속에서 반복된다.
그렇게 꼬박 보름 동안의 시간이, 꿈속에서 흘러갔다.
*
낮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자신이 아주 잠깐 잤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잠들기 전에 보던 음악 프로그램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가수는 이제 마지막 노래를 시작하기 전 짧은 멘트를 하고 있었다.
“이건 제가 8년 동안 무명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담은 노래예요. 밖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집에 오면 고스란히 느껴지는 감정들, 돌아보면 어떻게 버텼나 싶었던 때의 기억입니다.”
자그마치 8년? 남자는 꿈속에서 고작 15일 동안 겪었던 고통스런 시간을 떠올렸다. 남자는 아무 확신도 없는 채로 8년의 세월을 살아온 그 가수의 마음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8. ‘타인의 삶(체험판)’ 출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