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한낮의 연애」
영업팀장을 그만두고 시설관리직을 맡으라는 인사이동 통보를 받은 날, ‘필용’은 문득 십육 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를 떠올린다. ‘모양이 빠지는’ 직함으로 회사 사람들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웠던 필용은 혼자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점심시간이 지나버린 한낮의 맥도날드. 거기에 앉아 있는 이들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트랙에서 튕겨져나온 걸까, 제 발로 그 트랙을 벗어난 걸까. 문득 창밖을 본 필용은 “나무는 ‘ㅋㅋㅋ’ 하고 웃지 않는다”라는 연극 현수막을 발견하고, 대학 시절 짧게 연애했던 ‘양희’의 존재를 기억해낸다. 앞만 보고 트랙 위를 달리는 대신 ‘바로 오늘’의 감정을 소중히 하며, 못난 필용의 모습을 비웃지 않고 마치 나무처럼 가만히 지켜봐주었던 그녀. 중년에 접어든 필용은 또 한번 무조건적인 위로를 갈구하며 스물일곱 살의 마음으로 소극장을 방문하기 시작한다.
「조중균의 세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당히 처세를 익히고, 사소한 감상들은 버릴 줄 알게 된 ‘나’. 한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해서 파악해보니 ‘나’는 입사 동기인 ‘해란씨’와 석연찮은 경쟁을 벌여야 한다. 스스로의 경력에 자신은 있지만, 어린 해란씨는 왠지 요즘 세대가 잃어버린 어떤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부장의 표현에 따르면 ‘나’가 정식으로 팔기 위해 손질된 고기라면 해란씨는 “주먹구구식으로다가 막 썰다보니” 어엿한 상품이 된 주먹고기랄까.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는 태도 때문에 회사에서 고지식하고 답답한 인물로 통하는 ‘조중균씨’도 그런 해란씨하고는 곧잘 교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셋만의 조촐한 회식 자리에서 ‘나’와 해란씨는 조중균씨의 ‘지나간 세계’가 품고 있던 어떤 낭만에 대해 듣는다. 그 낭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해란씨를 비유하던 말, 주먹고기의 ‘주먹’은 부장의 말과 달리 힘껏 움켜쥔 단단한 손을 뜻하는 게 아닐까.
「세실리아」
마흔이 다 된 대학 동기들의 허랑방탕한 송년 술자리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학 시절 사회과학 서적이나 르포 영화를 집어들곤 했던 경험이 무색하게, ‘나’와 친구들의 대화는 세속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다. 그러다 누군가가 ‘세실리아’라는 이름을 화제에 올린다. 세실리아는 애정결핍 환자처럼 친구들에게 엉겨붙길 잘하던, 같은 동아리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 따돌림을 당한 미대생이었다. 그녀를 안줏거리 삼아 시시덕대는 남자들이 불쾌해진 ‘나’는 직접 세실리아를 찾아가보기로 한다. 하지만 ‘나’를 무척 반기는 세실리아와 달리, ‘나’에겐 그녀와의 저녁식사가 어색하기만 하다. 어긋나고 뚝뚝 끊기는 대화의 끝에 ‘나’는 드디어 세실리아의 본모습을 마주한 것 같아 애틋하기도 한데, 문득 세실리아는 그녀에게 덧씌워져 있던 오해의 전말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반월」
‘나’의 가족은 그해 여름, 섬에 있는 이모 집에서 ‘버케이션’을 보내기로 했다. 사실은 빚쟁이를 피해 은신하는 것이지만, ‘나’는 공상을 통해 그 상황을 피크닉의 일종으로 생각해버릴 줄 아는 고등학생이다. 섬에서 만난 이모는 마치 그 섬에서 나갈 줄 모르는 사람처럼, 어떤 무기력함에 짓눌려 겨우 ‘잔존해’ 있는 것 같다. 사촌이자 이모의 아들인 ‘동수’가 이모와 통화하기 위해 애타게 전화를 걸어오지만, 이모는 그때마다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는 것으로 자신의 잔존을 알릴 뿐이다. 이모의 자발적인 고립에 슬몃 공감하는 ‘나’의 마음속엔 ‘왜’라는 질문이 남는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왜, 무엇 때문에?” 그 의문을 감싸듯, 반월이 걸린 밤바다엔 화려하고 눈부신 불꽃이 수놓인다.
「고기」
‘그녀’는 마트에서 사온 고기에서 상한 냄새를 맡는다. 그녀는 소비자로서 온당한 권리를 행사하고자 마트 본사에 항의 글을 올리고, 해고 위기에 처한 마트 직원이 그녀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얼굴에서 어떤 표정들을 지우려 애쓰면서 비굴하게 사과하는 마트 직원을 그녀는 끝까지 무시한다. 집은 점점 가난해지고, 남편은 생활비를 벌어오기 위해 뭔가 위험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남편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들은 왠지 미덥지 않다. 어느 날 남편이 천만원과 함께 집에 가지고 들어온 자루에서 핏물이 배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자루를 풀어 진실을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그 순간 왠지 홀가분한 표정의 마트 직원이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은 수상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온다.
「개를 기다리는 일」
유학을 나가 있던 중, ‘그녀’는 엄마로부터 아끼던 개를 잃어버렸다는 연락을 받는다. 너무 소중해서 차마 다른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그저 ‘개’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그 개를. 모녀는 개를 잃어버린 공원 입구에 미니 쿠퍼를 세워두고 개를 기다린다. 그녀가 귀국했다는 것을 알면 아빠는 또 폭력을 휘두를 것이다. 한줄기 바람이 현수교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면서 다리를 무너뜨렸다는 지겨운 설교를 하면서, 작은 균열로부터 파생되는 불운을 들먹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개는 나타나지 않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얻을수록 엄마의 회상과 어긋나는 기분이 든다. 집에 들어가니 아빠를 찾는 전화가 걸려오고, 집안 분위기는 왠지 살풍경하다. 개는 죽었을까. 아빠는 살아 있을까. 그녀가 없는 동안 엄마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녀’가 자란 화천의 고아원에서는 종종 돈을 부쳐달라는 편지가 온다. 편지를 열어볼 때마다 그녀는 가난한 고아원에 부채감을 느끼며 돈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자니 머뭇거려진다. 고아원의 수녀님에게 ‘냉정하지만 공평한 훈육’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수녀님의 행동은 그저 폭력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상경해서 자리잡은 동네는 옥수동. 이곳은 고아원 옆으로 넓게 펼쳐져 있던, 키가 크고 울창해서 공포와 동경심을 동시에 심어주었던 옥수수밭을 생각나게 한다. 고아원을 나왔지만 아직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그녀는 일하는 병원에서 수녀님과 꼭 닮은 환자를 만난다. 잃어버린 구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환자를 찾아 병원 옥상에까지 올라온 그녀는, 자신이 어떤 환영에 이끌렸음을 깨닫고 왠지 후련한 마음으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본다. 마치 별처럼 반짝이는 그 빛들을.
「보통의 시절」
어느 성탄절 저녁, ‘나’는 사 년 만에 형제들과 만난다. 알고 보니, 어려서부터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온 큰오빠가 다음주에 위암 수술을 받는다는 비보를 전하는 자리다. 생에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은 큰오빠는 다 함께 ‘김대춘’을 찾아가 그가 우리 가족을 얼마나 큰 불행에 빠뜨렸는지 성토하자고 한다. 김대춘은 부모님이 운영하던 목욕탕에 불을 질러, 그들을 하루아침에 가난한 고아 신세로 전락시킨 자다. 그리하여 ‘나’는 형제들과, 아끼는 과외 학생 ‘상준이’를 대동하고 일산 김대춘의 아파트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부모님을 죽인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김대춘의 때늦은 고백을 들은 형제들.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추동해온 복수심은 돌연 갈 곳을 잃고, 가족들은 이 한바탕 소동극을 “그냥 그런 보통의 일”로 넘기려고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보고 들은 상준이의 “잊기는 어떻게 잊어요?”라는 한마디는 이 한밤의 크리스마스를 보통때보다 조금 오래 붙잡아둘 것 같다.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가구회사의 베테랑 직원 ‘모과장’은 대기업과의 합병을 앞둔 회사로부터 ‘직능계발부’로 발령받는다. 책상도 없는 회사 강당에서 합판을 사포로 가는 의미 없는 작업을 하면서도, 모과장은 다른 직원들의 연대 투쟁 요청을 거절한다. 그의 처세술은 고양이처럼 “네발을 모두 몸체 밑에 말아넣고 그냥 있음으로써” 살아남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세련된 고양이처럼, 모과장은 회사에서 원하는 자질을 갖춰놓은 뒤 사장과 독대하여 자신의 처우에 대해 논의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제야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해고자들이 회사 굴뚝에 설치하다 포기한 현수막. 굴뚝으로 올라가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는 연대의 장에 발을 들이는 이의 꿋꿋하고 따스한 분위기가 감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