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나랑 눈 마주치기라도 하면 고개도 홱 돌리고 화나서 얼굴도 찡그리고 그랬어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부끄러워서 그랬던 거 같아요. 제가 윤의 등을 밀어주면 윤의 귀가 새빨개졌거든요. 그리고 윤은 계집아이예요.” 하윤은 정말 운채와의 목욕사건으로 실랑이를 많이 했어야 했다. 아무리 인간 계집의 몸으로 운채와 함께 생활을 한다지만 같이 목욕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운채는 그런 그가 목욕을 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말았다. 어느 날인가 목욕을 하지 않으면 같이 잘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자 그는 소고삐 꿰듯 운채에게 끌려 밤마다 개울가로 끌려가야 했다. 한 번도 자신의 몸을 누군가에게 맡긴 적이 없던 그가 특히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 또한 그녀의 등을 밀어줘야 하는 입장이라 그 난감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혼자 목욕을 하겠다고 한 후에도 가끔 불쑥 불쑥 개울가로 찾아와 그를 덮친 운채였다. 등은 혼자 밀 수 없다는 그녀의 고집으로. “한 번은 밤에 목욕하다 산짐승 소리가 나는 거예요. 발자국 소리도 점점 다가오고요.” 운채는 내운산 이야기를 꺼내자 신이 나 입을 멈추지 않았다. 말하면서도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입에 웃음을 물고 있었다. 하윤은 그런 운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을 삐쭉삐쭉 거리고 고사리 같은 손을 가졌던 아이가 이만큼이나 컸다. 그러고 보니 감회가 새롭군. “정소부의 일이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두어도 좋다. 네 목숨도 안전할 것이다. 다만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오늘의 일은 잊지 말아라.”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설류 님이 너그러이 용서해주신 것도요.” 운채는 오늘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할 뻔했는지 깨닫고 다시 한 번 그 두 사자들에게 미안했다. 그 사자들은 분명 혼백을 담지 못하거나 잘못되면 자신들까지 잘못됨을 알고 있었을 텐데 묵묵히 그녀를 따라 주었다. 정소부의 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니. 그놈은 정말 네가 죄를 지었다면 그만한 값을 받아낼 놈이다. 내 말은 인간을 대하는 마음을 무디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사자가 처음부터 마음을 잃었겠느냐? 마음이 헐어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을. 전 정소부 주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태상궁 특히 정소부는 알에서 새끼 깨어나길 기다리는 어미 새의 심정으로 묵묵히 인간을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고 했지. 그 걸걸한 반오가.” “귀담아 새기겠습니다.” “하긴, 넌 너무 감정에 치우치니 문제이긴 하다만.” 하윤은 그런 운채가 마냥 귀여운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술이 취한 그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운채는 이 두근거림이 술 때문인지 그의 미소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냥 이 따뜻한 밤바람이 좋았고 그와 조용히 풀잎을 밟고 걷는 소리가 좋았고 나직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리고 말이다.” 조금 전까지 부드러웠던 그의 목소리가 불퉁스럽게 변했다. “다시는 누구도 덥석덥석 안지 마라. 난 널 그리 가르친 적이 없다.” “제가 언제 누구를 덥석 안았다고…….” 마치 그녀가 경망스럽다 비난하는 것 같아 그녀는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녀가 음전하다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해도 아무 사내에게 수작질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 뭘 가르쳤단 말인가. “그럼 아까 그 사자는 안은 게 아니면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이냐?” “그건…….” “오늘 아침 인간계에 내가 아니라 이원이 옆에 있었다면 이원하고 덥석 인사를 나눴을 것 아니냐?” 아니었다. 그였기에 마지막 인사를 그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특별한 의미로 변할 것 같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운채가 걸음을 멈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표현으로 강하게 부정했다. “그럼?” 그는 은근히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냥 넘어가도 좋으련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입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꽉 다물려져 있었다. 하윤이 고개를 숙여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았고 눈과 눈이 얽혔다. 운채가 숨을 죽여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 마라.” 낮지만 진지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도 네 향을 맡게 하지 마라.”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말이 주술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채가 나직이 고개를 끄떡이자 하윤의 내리깐 눈에 만족감이 서렸다. 이 향은 그만 맡을 수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공들인 향이었다. 그런 향을 아무에게나 맡게 할 수 없다. “착하구나.” 그의 숨결이 다가오더니 운채의 입술을 덮었다. 곧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갔다. 깜짝 놀란 그녀가 뒤로 물러서려 하자 하윤이 그녀의 뒷목을 움켜잡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하윤은 그녀의 반응을 무시한 채 그녀의 속살에 숨겨둔 달콤한 즙을 찾아 삼켰다. 그녀의 혀를 건드리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며 한참을 맛보았다. 맛볼수록 갈증을 부추기는 입맞춤은 더욱 깊이 그녀의 속을 헤집으며 그녀의 뱉은 숨까지 모두 삼켜버렸다. 한 번도 누군가와 입맞춤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과 흥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이 향은 내 것이다.” 입술과 입술이 그대로 맞닿은 상태에서 그의 짙은 음색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 갔다. 하윤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턱에서 귀밑으로 그리고 목 언저리로 옮겨갔다. 작게 벌어진 입으로 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은 탐스러웠다. 그의 긴 눈썹에 감추어진 검은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 하윤은 그녀가 호흡을 다 뱉기도 전에 다시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처음보다는 천천히 하지만 더 농염하게 그의 입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좀 더 그녀의 입 안을 마음껏 헤집기 위해 그가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바르작거릴 수조차 없게 품 안에 완전히 가둔 하윤은 한 호흡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집어삼켜버렸다. 버거워하는 그녀의 가쁜 호흡 속에 혀와 혀가 얽히고 숨과 숨이 얽혔다. 달 밝은 밤, 얕은 신음 소리와 타액이 빨려가는 소리가 한동안 정원 뒤뜰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