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주요 소통의 매개인 인스타그램에서 과시적 행위가 보편화되어 이제 어지간한 과시는 과시로 보이기보다 정말 소통이라 인식할 만하다. 소지역에서 자식의 대학 합격이나 승진 등을 현수막에 걸어 과시하는 문화를 낡은 시골 문화처럼 비웃지만, SNS에서 세련된 형식으로 포장된 자 식 자랑을 생각하면 현수막은 너무도 소박하다. 오프라인의 현수막은 온라인의 포스팅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자랑은 온오프를 넘나든다. 자랑의 일상화는 부끄러움 대신 부러움을 유발한다. 내가 선망할 타인과 나를 선망하는 타인이 필요하다.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다. 셀러브리티와 인플루언서 문화에서 연대가 가능하지 않은 이유다. 영향력을 추구하는 셀럽 문화는 연대를 방해한다. 모두가 일간 ‘나’의 발행인이다. 타인은 ‘나’의 구독자다.
---「이라영 - 관종 되기, 권력중독일까 저항의 도구일까」중에서
우리의 눈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추천 알고리즘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스마트폰의 연장(延長)이자 보철(prosthesis)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데이터 분석 업체로부터 보는 능력을 외주 받은 디지털 노동자들이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을 가장 극단적으로 예지한 작가는 바로 필립 K. 딕일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광고는 삶을 수축시키고 망가뜨리는 작은 악마들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광고. 정말로 한계선을 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광고였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게다가 광고는 모든 곳에 있었다.”
---「이연숙 - 아래로, 더 아래로: 바닥없는 무한 스크롤링과 보기의 디지털 노동」중에서
SNS는 이미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현실 공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인스타그램에서 우리가 자꾸 우습고 초라해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팔로워 수가줄었을 때 내가 누구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지부터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아니면 인친이 올린 게시글이 좋다고 느꼈지만 굳이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지나치는 순간에 대해서는? 친구를 ‘언팔’하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쳐다보고 있는지, 혹은 무시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내가 당신을 상상하는 방식에 대 해, 당신이 나를 상상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주고받는 시선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김지효 - 인스타그램 뒤의 작가들」중에서
사실 빛삭에서 중요한 점은 누군가가 빛의 속도로 게시물을 삭제함보다, 누군가가 얼른 게시물을 삭제하는 동안 금세 캡처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유명인일수록, 자신이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버린 게시물이 아무개의 스마트폰 속 스크린샷 대상이 됨을 감지한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고 있다는 듯, 더 나아가 무슨 일이 일어날 때까지 지켜봐 왔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러 어느 셀럽의 계정에 올라 온 기록들을 캡처한다. 특종을 기다리는 파파라치처럼. 나도 인스타그램을 하며 파파라치가 되어본 적이 있다.
---「김신식 - ‘빛삭’에 대한 단상」중에서
차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차별당한 사람이다. 불평등을 겪는 자는, 그래서, 자꾸만 설명할 책임까지를 떠안는다. 차별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기득권 앞에서 차별을 증언하는 일은, 모멸당하는 걸로 모자라 그 모멸의 내용을 직접 입증해야 하는 이들에게 끈적한 고단함을 안긴다.
---「김인정 - 보이지 않는다」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새로운 매체를 다루는 사람의 몸짓과 그가 가로지르는 장소들이 스크린에 비치는 방식이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 캠코더를 들고 금지된 장소로 향하는 학생들, 무언가 비밀스러운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어두컴컴한 방의 컴퓨터 앞에서 씨름하는 해커 등은, 나란히 앉아 스크린에 비친 영화를 보는 커플만큼이나 한때 영화 스크린에 범람하던 익숙한 클리셰였다.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20세기의 영화는 이런 몸짓들을 스크린에 비추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고. 다정하게, 우스꽝스럽게, 위태롭게, 무시무시하게, 끔찍하게, 긴장되게, 행복하게, 쓸쓸하게, 그리고 온갖 방식으로.
---「유운성- 터칭 스페이스 :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중에서
먼저 오늘날 우리가 이미지를 대면하기에 앞서 이미지와 상관적인 텍스트를 입력하여야 한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미지와 조우하기 위해 우리가 볼 이미지가 무엇일지를 짐작하고 그것을 텍스트로 입력해야 한다. 이는 모든 이미지가 사전에 인지적으로 구획되고 규정되어 있기를 요구한다. 마치 인공지능생성 이미지가 머신러닝을 위해 먹어 치우는 이미지들이란 게, 알고 보면 이미 낱낱이 ‘태깅(tagging)’된, 즉 색인분류된 이미지 데이터셋(data-set)이듯 말이다. … 조슬릿의 말처럼 이제 이미지의 의미는 검색의 인식론에 의해 좌우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획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데 이런 일이 그리 새로운 일이란 주장은 우리를 의심케 한다. 어느 글에선가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 사진은 공존하는 메시지의 복합체 속에 있다. 사진이 어느 신문에 실리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고, 그 사진이 어느 기사, 제목, 캡션과 결합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배당된다는 것을 상기하자면, 사진과 텍스트의 관계가 사진의 의미를 조정한다는 생각은 사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서동진 - 사진과 글, 글과 사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