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 멜로디를 주는 경험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중략)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pp.30~31
그레고리우스는 숨이 턱에 차서 자리에 앉았다. 기차가 이룬을 향해 출발하자 제네바에서 그를 엄습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무척이나 명료하며 매우 현실적인 이 여행, 시간이 흐르고 역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그를 지금까지의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이 여행이 계속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기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 pp.57~58
에사는 찻잔을 잡으면서 눈을 감았다. 자기 눈을 감으면 다른 사람 눈에도 흉한 손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손은 뜨거운 담뱃불로 지진 흔적이 가득했고 파킨슨병에 걸린 것처럼 떨렸으며 손톱 두 개는 아예 없었다. 에사는 자기 손을 보고도 참을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듯이 그레고리우스를 쏘아보았다. 그레고리우스는 현기증처럼 몰아치는 경악을 애써 누르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내 잔은 반만 채워야 하는데.”
낮게 잠긴 목소리로 에사가 말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 뒤에도 이 말을 잊지 못했다. 눈물이 날 듯 눈이 따가웠다. 그는 학대받은 이 노인과 자신의 관계에서 영원히 기억될 행동을 했다. 에사의 찻잔을 들고 뜨거운 차를 반이나 마신 것이다. 혀와 목구멍이 덴 듯 뜨거웠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반만 남은 찻잔을 조용히 제자리에 놓고, 손잡이가 에사의 엄지로 향하게 돌려놓았다. 에사는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 p.161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과거에 머물렀던 정거장 플랫폼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디면, 그래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서 아주 외딴 구석, 우리가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무척 어두워 보이지 않던 곳에….
--- pp.338~339
그레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베른의 고전문헌학자인 문두스가 세상의 끝에서 갈리시아 어부들에게 삶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겼다. 불합리함과 피로, 과장된 쾌감과 경계를 넘어서, 지금까지 모르던 해방감이 섞인 이 상황을 그는 한껏 즐겼다. 어부들이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는 더듬거리는 에스파냐어로 두 번 더 물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걸!”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레고리우스도 얼마나 흥겹게 따라 웃었던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 p.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