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고생은 힘든 일 때문이 아니었습죠. 그때 쇤네는 지금처럼 시전 상인이 아니었고, 길가에 좌판을 벌여 놓고 물건을 파는 난전 상인이었지요. 한데 난전은 시전 상인의 밥이었습니다. 시전 상인은 나라의허가를 받은 상인입니다. 그들은 그때 저 같은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모질게 다루었습지요. ‘금난전권’이라나 뭐라나. 하여튼 그러면서 시전 상인은 난전 상인의 물품을 자기들에게 넘기라 했고, 팔 물건을 자기들한테 사 가도록 했지요. 이해할 만도 합니다. 자기들은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관청에 싼값에 납품하는데, 허가도 받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는 난전 상인이 자기들과 똑같은 물품을 길에서 싸게 파니 화가 안 나겠습니까요.
--- pp.15-16
시전 상인은 시전 상인이 아닌 자가 함부로 물건을 파는 경우 판매한 물건을 압수하고 판매자를 체포하고 가둘 수 있는 엄청난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것이 바로 난전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 즉 ‘금난전권’이다. 조선 후기 들어 금난전권으로 인한 횡포가 심해지고 난전의 수가 늘어나자 중요한 여섯 가지 품목을 파는 육의전만 예외로 두고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
--- p.24
그래서 기존에 백정이라 불리던 양민은 자신들을 ‘구백정’, 도축하는 백정을 ‘신백정’으로 부르면서 신백정을 몹시 차별하고 멸시했다. 그 차별은 차마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백정은 어린아이에게도 허리 숙여 인사를 해야 했고, 돈이 있어도 비단옷을 입어서는 안 되며, 결혼할 때 가마를 타면 안 되고, 죽어서도 상여를 쓸 수 없었다. 이를 어기면 어떻게 되느냐고? 그건 조금 뒤에 보게 될 것이다
--- p.51
대한민국 군인은 나라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무기도 주지만, 조선에서는 군복, 식량, 무기를 본인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직접 군역을 지는 정군을 뒤에서 경제적으로 도와 주는 보인 제도를 두었다. 복무 기간은 어땠을까? 조선은 16세부터 60세까지 무려 44년 동안 군역을 졌다. 44년 동안 계속 군 생활을 하는 건 아니고 매년 두 달에서 여섯 달 정도 군영에 가서 훈련을 받고 토목 공사에 동원되거나 국경 수비를 담당했다.
--- p.66
“선생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혹시 이렇게 똥을 팔아서 한 해에 얼마를 버시는지요?” 예덕 선생이 미소를 지었다. 그건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한 6,000냥쯤 되지요.” 선생의 답에 박 도령과 돌쇠가 입을 쩍 벌렸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당시 한 냥이 5만 원 정도니 연봉이 3억 원 정도 되는 것이니까.
--- p.103
그렇다. 전기수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기이한 이야기를 낭독하는 사람을 뜻한다. 한마디로 책 읽어 주는 남자라고 할까. 조선 후기 들어 소설이 유행하면서 요즘 사람들이 유튜브를 보는 것럼 너도나도 소설 읽기에 빠졌다. 글을 몰라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나 돈이 없어 책을 빌려 읽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저자나 다리 밑에서 책을 읽어 주는 전기수가 큰 인기를 누렸다. 조수삼이 지은 『추재집』 기이편에 전기수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전기수는 동문 밖에 살았다. 『숙향전』, 『심청전』, 『설인귀전』 같은 전기를 구술했다. 월초 1일은 청계천 첫째 다리 밑에 앉고, 2일은 둘째 다리 밑에 앉고, 3일은 배오개, 4일은 교동, 5일은 대사동 입구, 6일은 종루 앞에 앉는다. 이렇게 거슬러 오르다가 7일째부터는 그 길을 따라 내려온다. 책을 재미있게 읽어 주기 때문에 그 주위에 들으려는 사람이 빙 둘러싼다.”
--- p.149
“한데, 거간비로 얼마를 받으시는지요?” 박 도령이 물었다. 표 서방의 답을 들은 박 도령과 돌쇠는 억, 하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선 후기 기록에 “1,000냥을 매매하고 100냥을 받으니”라는 기록이 있다. 수수료로 매매가의 1할, 즉 10퍼센트를 받는 것이니 놀랄 만도 하다. 집주릅이 집에 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당시 고리대가 연 3할의 이자를 받았다고 하니 이해할 만도 한 일이다. 하지만 집주릅이 많이 생기고 거래가 늘어나면서 수수료도 내려가 구한말 고종 대에 이르면 1퍼센트대로 떨어졌다.
--- p.172
해마다 조선은 중국에 사행단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그러면 중국 황제가 답례로 물품을 주는데, 이것을 가지고 와서 파는 걸 조공 무역이라고 한다. 조공 무역의 주역은 사신단의 통역을 맡은 역관이었다.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조선의 역관은 청과 일본의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사행단에 참여해 청에 갈 때 인삼을 가지고 가서 판 돈으로 고급 비단인 명주와 명주실, 도자기, 차 등을 들여와 부산 왜관에 있는 일본 상인에 팔아 이익을 챙겼다. 그 차익이 커서 역관 중에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박지원이 지은 『허생전』에 역관이 등장한다. 돈을 벌어 올 생각은 하지 않고 허구한 날 책만 읽는 허생에게 아내가 돈도 못 벌어 오느냐고 구박하자, 허생이 서울 제일 갑부에게 돈을 빌리는데, 그 인물이 바로 변 씨 성을 가진 일본 통역관이었다. 조선 시대 역관은 대외 무역이 금지된 조선에서 그나마 수출입 산업을 이끌던 산업역군이었다.
---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