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에 오쓰카 에이지의 문제의식은 복도훈의 그것과 전혀 다른 과녁을 향한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오늘날 예술가와 범죄자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그것이 오늘날 소설에서 ‘문체’가 소멸하고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쓰카 에이지는 에토 준의 말을 빌어 범죄자가 사회 현실과 알력을 빚듯 작가 역시 사회와 알력을 빚는 과정에서 문체가 탄생하는데 요즘에는 어느 작가도 예전 범죄자가 사회와 알력을 빚든 자신의 사회와 알력을 빚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와 거대한 알력을 빚을 만큼 대범한 범죄자적 기질을 가진 사람을 오늘날 문학계는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범죄 대신 문학을 쓸 법한 사람이 문학으로 진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졌”으며 “스스로를 ‘무뢰배’나 ‘한량’의 후예처럼 연출하는 문학자들의 인간 실격이라는 것이 요즘은 기껏해야 편의점 다니듯 ‘풍속업’에 다니고 어머니 연금에 기생하는 수준의 반사회성”에 불과하다는 것이 오쓰카 에이지의 진단이다,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한영인)」중에서
『소년이 온다』 소설 속 에필로그의 ‘나’는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 속 인물의 고통이라는 타자를 마주하여 책임을 지고자 한다. 에필로그의 ‘나’가 ‘작가의 말’이 아닌, 소설 속 또 하나의 장인 ‘에필로그’에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소설 자체를 타자로 마주하여, 이 소설에 책임을 지고자 소설을 쓴 자로서의 ‘나’를 내세워야만 했을 수도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로 말해보자면, 주체의 기존 존재 방식을 문제 삼고 주체로 하여금 거부하기 힘든 요구-명령을 내리는 타자와 주체의 관계는, 기존 한강의 소설에서는 주로 소설 속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를 변곡점으로 하여 이 관계는 소설 속 인물과 작가로 추정되는 ‘나’ 사이로까지 이어진다.
---「고통이 사랑일 수 있을까 ―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이근희)」중에서
서양의 좀비서사와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의 좀비서사는, 좀비(혹은 괴물)가 된 과거의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부정적인 타자인 적대자로 간주하는 서사적 문법을 공통으로 따르고 있다. 〈워킹 데드〉에서 포로 한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중인의 의사와 시간을 소모했지만, 다가오는 좀비(워커)를 죽일 때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끔찍하고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연출하여, 좀비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사람을 해치는 자는 분명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명제를 숙지시켰다.
---「멸망한 세상으로의 망명과 그 이후 소환되는 서사 윤리 ― ‘좀비서사’의 준동과 ‘종말의 상상력’의 확산에 대하여」(김남석)」중에서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차라리 이 부근에서 김재홍 비평의 궁극적 방향, 그가 애초에 “인간적·인류적 안간힘”으로 가닿고자 한 시(시인)의 진경 지대가 투명하게 내려다보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삶의 제반 현실적 문제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결국에는 인간의 고유한 내면에로 차분하게 가라앉는 그 시(詩), 문학과 철학의 접경지역에서 사유하는 그 시인(詩人)들 말이다. 김재홍 식의 명명법으로 환기해보이면, “생명·사랑·평등”의 시정신이 내면의 도처에서 꿈틀거리는 그 〈시와시학〉들 말이다.
---「문학과 인간학의 접경 - 김재홍의 비평 세계」(이성천)」중에서
문학의 힘이자 핵심적 가치로서 ‘응전력’을 강조하고 있는 김재홍의 비평적 태도는 바로 이 점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그는 시문학 고유의 미학적 특질에 대한 관심과 함께 언제나 ‘현실’과의 구체적 접점을 강조한다. 또 다른 비평적 성과 중 하나인 『카프시인 비평』(서울대출판부, 1990.) 역시 이같은 관점에서 비롯한 결과이다. 하지만 카프 시인들에 대한 관심을 두고 있을 때조차 역사적 현실이 부과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가 내세우고 있는 ‘응전력’은 현실과의 접점에서 비롯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을 유지해나가는 힘은 결국 시문학 고유의 예술적 구조를 통해 이어지는 보다 근본적 차원에 내재되어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천으로 써 내려간 삶과 문학 - 김재홍의 비평 세계」(남승원)」중에서
홍용희의 비평에서 이러한 생태학적 인식은 서구적 전통보다는 불교, 노장사상, 동학사상 같은 동양적 사유와 연결된다. “인간과 자연을 주객 동일성의 위상에서 설명하는 방법론은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는 동양의 전통적인 생명관과 친연성을 지닌다.”라는 지적처럼 인간과 자연을 연속적인 관계로 인식하는 전일적 세계관은 비서구 지역의 사유에서 광범위하게 목격된다. 가령 ‘아마존 인류학’에서는 “강이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그 강이 우리의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된다. 이들은 비-인간 존재자를 배제하는 ‘인류’라는 추상물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강과 산 같은 자연에서 인격을 제거하면 자연은 결국 산업과 채굴 경제 활동의 폐기물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오래된 미래와 신생(新生)의 원리 - 홍용희의 비평 세계」(고봉준)」중에서
양안다의 시는 ‘창문’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방’의 ‘안’과 ‘밖’이라는 공간적 이종 경계면을 형성하고 꿈·현실 등의 내면 정신적 경계, 과거·현재·미래 등의 시간적 경계, 나·너·우리·선생 등의 인물적 경계 등을 횡단하는 이질 혼종적 몽타주를 형상화한다. 양안다의 ‘시적 인터페이스’ 사례인 ‘거울’은 ‘방’의 내부에서 다시 시적 주체 및 타자의 분열뿐만 아니라 시적 공간, 내면 정신, 시간, 인물 등의 분열을 파생시킨다. 따라서 ‘거울’의 ‘인터페이스’는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생성시키는 ‘왜곡’, ‘변형’, ‘전도’ 등의 몽타주 방법론에 ‘분열’의 몽타주 방법론을 개입시켜 보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입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시적 인터페이스와 몽타주의 방법론 - 양안다 시의 미로형 프레임 형상화 방식」(오형엽)」중에서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의 구분을 가능하게 한다. 체험은 해석되며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이 되고, 이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하게 만든다.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 생각에 의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해있다. 여기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 결과물의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것을 다룰 때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AI 시대 탄생하는 예술가와 그의 붉은 몸」(강지희)」중에서
류수연은 문학이 “기본적으로 한 작가의 세계관 위에서 구현되는 것”(339쪽)이지만, 트랜스미디어 시대의 문학은 상호텍스트에 기반한 의사소통으로써 대화의 장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점을 정확하게 짚는다. 이는 미디어 변화에 따른 문학의 형질변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류수연 나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듣기(listening)’와 ‘말 건네기(talking)’이 가능한 자리가 되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성취해야 할 자리이자 역할인 셈이다. 이 상호소통의 무대 위에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관계성’에 기반한 ‘또 다른 나’와의 연대라는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수행을 통해 억압적이고 폭력적으로 경화된 세계에 균열을 일으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듣기(listening)’와 ‘말 건네기(talking)’로부터 한 걸음 ― 류수연, 『함께 내딛는 찬찬한 걸음』(소명출판, 2023)」(이병국)」중에서
물론, 비평이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부터 ‘비평에 대한 비평’에 해당하기에 마슈레의 분류나 벤야민의 지침 역시 하나의 비평적 관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비평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위치하고 차지한 좌표에 대해 갖는 분명하고도 정교한 자의식. 그러니 ‘누가’ ‘언제’ 썼는지 선명하지 않은 글은 내 관심의 범위도 아닐뿐더러 아무리 유려하고 재치있게 쓰여있다 한들 내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비평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나의 기준은, 비평가가 스스로 부여한 좌표가 선명하게 가시화되어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그 좌표의 세공을 위해 비평가가 기울이는 노력은 무엇에 근거하는지와 같은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아영이 비평가로서 보여주는 확고한 좌표와 성실한 수고에는 감탄할 만한 데가 있다.
---「중력과 미래 ? 인아영의 『진창과 별』을 읽으며」(이소)」중에서
데리다의 메시아성은 경제적 규범과 일반 윤리를 넘어서면서도 약속(promise)을 강조한다. 데리다의 약속은 해체불가능한 정의와 맞물려 있다. 데리다에게 약속은 도래하는 것에 대한 희망이며 현재 미완성인 민주주의에게도 ‘도래할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임스 조이스로부터 카오스모시스(chaosmosis)를 혼돈의 우주를 예술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임을 배웠듯이, 데리다도 『율리시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는 블룸의 부인의 ‘예스, 예스’라는 긍정의 진술에 큰 의미를 둔다. 데리다는 두 예스 중 하나는 다른 의미를 의미할 수 있어서 긍정의 운동이 오염될 가능성이 있지만, 이런 오염의 가능성이 열림과 우연을 가능하게 하여 긍정이 되게한다고 말한다. 이 ‘무조건적인 긍정’은 약속과 함께 정의와 연결된다.
---「물리적 전회(Material Turn) 시대에 쟈크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Messianicity without Messianism)의 의의」(신명아)」중에서
배우는 검은색 줄이 놓인 노란색 옷을 입고 무대 위를 날면서, 세계를 계산하던 익숙했던 방식을 끝낸다. 우스꽝스런 꿀벌복장을 한 배우를 우리가 드물게 보아온 것은 아니나, 연극이 인간에 대한 찬가라는 오랜 선언은 트램폴린 위를 폴짝거리며 꿀벌이 되려는 배우의 진지한 노력 앞에 무용지물이 된다. 성수연은 배우의 존재양식, 그리고 꿀벌의 존재양식을 무대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잇는다. 이 네트워크는 교섭의 장이 되고 이곳에서 모든 개체들의, 라투르에 의하면 모든 액터(Actor)들의 평등한 대화가 가능해진다. 액터들이 상호작용하여 관계를 형성하는 공간으로서 라투르의 네트워크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 트랙의 가장 바깥에 위치하는 존재들을 인식하고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찬가가 사라진 무대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기계이든 동물이든 상호작용을 통해 네트워크 안에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이들의 역할은 네트워크 안에 흐름을 형성해 어떤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대 연극의 존재론적 전회 ― 우란 2경, 성수연 작 〈B BE BEE〉」(전정옥)」중에서
분명한 것은 산업으로서의 한류나 정치적 외교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려는 문화민족주의적 성향에서 벗어나 ‘한류’는 하나의 ‘문화’로 ‘공유되어야 할 연대운동’이라는 점이다. 모든 문화가 그러하듯 철저하게 자국만의 문화도 타자모방으로서의 문화도 없다. 문화는 타문화를 만나 수용, 모방, 배척을 통해 재창조되고 재수용된다. 그런 점에서 문화는 잡종의 DNA이며 혼종교배의 특수한 형태인 것이다. 한류에서 ‘한국인의 특유의 정체성’ 혹은 ‘한류DNA'라는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지나친 국가주의, 애국 마케팅의 일환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미 K팝을 기획하기 위해 세계적인 안무가와 편곡자 혹은 프로듀서를 영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혼종은 이루어지는 셈이다. 글로벌은 혼종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한류는 하나의 로컬 문화가 문화적 동질과 상이성을 넘어서서 상이한 문화들과의 공존의 한 지점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다시, 한류를 말한다」(김용희)」중에서
교육(education)과 놀이(entertainment)는 한국의 키즈콘텐츠를 대표하는 핵심 키워드다. 이 둘의 결합으로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는 한국 키즈콘텐츠의 정체성이 탄생한다. 그렇지만 에듀테인먼트가 교육과 놀이의 기계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교육에 있다. 요컨대 한국 키즈콘텐츠의 본질은 교육이고 놀이는 그 방법인 것이다.
---「한국 키즈콘텐츠와 한류」(휘민)」중에서
벨라의 각성과 확신에 찬 선언은 이전 작품들에 등장했던 비극적 인물의 왜소함에서 벗어나 있다. 〈가여운 자들〉의 벨라 서사는, 비유하자면, 〈송곳니〉에서 큰딸이 아버지의 차 트렁크 문을 열고 자신만의 세계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가는 식의 유토피아 버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를 사회주의 경향의 작품이라거나 페미니즘 지향의 작품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보다는 감독 란티모스의 철학적 고민과 엠마 스톤의 영화적 지향성이 빚어낸 한편의 성장담 또는 희망 서사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란티모스와 엠마 스톤의 협업이 기괴하고 모호하지만 매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여성 섹슈얼리티를 구현해 낸 것이리라. 적어도 〈가여운 것들〉의 벨라는 웃고 있다, 주체적으로, 연대의식을 구축하면서…. 잡종이자 생성하는 주체로서의 벨라는,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생성하는 기계’, ‘변이하는 주체’이다.
---「〈가여운 것들〉, 혼종(混種)과 생성(生成)의 존재론에 대하여」(박명진)」중에서
오마카세의 불호와 애호 둘 다 소비를 전제로 그것이 만드는 표면적이고도 지엽적인 차이에 관한 의식을 드러내 보인다. 무엇을 소비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소비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일 또한 ‘소비의 문제’다. 훗날의 풍족함을 기약하며 낭비를 죄악시하거나 가성비를 따지는 데 많은 공을 들이는 사람과 현재의 기쁨을 중시하는 가운데 맛있고 특별한 음식을 먹는 행위와 자존(自尊)의 실현을 등치하는 사람 전부를 포섭하는 것은 어떤 삶을 살지 결정하는 주체성의 가장 유력한 실천이 곧 소비라는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를 판단함에 물질의 풍족함 외의 다른 준거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요컨대 대립하는 태도들은 일치하는 가치관 위에서, 그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론상의 차이만을 표현한다.
---「어떤 욕망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인 오마카세」(구슬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