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해외 광고업계에서 매출 1, 2위를 다투는 광고 회사의 차장 자리에 오른 나는 머지않아 부장 자리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젖어, 서울과 부천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감도, 차장 자리도, 저녁 늦게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동차 속에서 한강 위에 드문드문 떠 있는 불빛을 바라보노라면, 늘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더해주곤 했다. 앞만 보고 달음질치는 아프리카의 산양(山羊), 스프링복처럼 앞만 보고 질주해온 나였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팩시밀리가 작동하는 소리, 인터폰 신호음, 전동타자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나는 혼자 버려져 있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고 봉황성을 떠나간 가락국(금관가야) 왕들의 이름을 기획안 용지에 긁적거려보곤 했다.
수로왕, 거등왕, 마품왕, 거즐미왕, 이시품왕, 좌지왕, 취희왕, 질지왕, 겸지왕, 구형왕.
--- p.14
버스의 차창으로 야트막한 산줄기가 솟아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그날 현 교수가 텔레비전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고 하던 말을 떠올렸다. 신녀(神女)와 함께 구름을 타고 진세(塵世)를 떠나가다니… 나는 구름을 타고 진세를 떠나간 왕자 주(?)의 생각에 깊이 빠져들어 갔다. 나는 지난 세월이 너무나 허망하다고 생각했다. 광고회사 차장 민기오가 아니라, 사학자 민기오로 지금 이 여행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속으로 뇌까렸다.
--- p.34
가락국이라는 소국(小國)이 동아시아사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서기 42년이다. 가락국은 사서(史書)에 가야ㆍ금관국ㆍ남가야(南加耶)?대가락(大駕洛)?가야국?임나가라?가라?남가라?금관 가야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서기 43년(수로왕 2년) 봄 정월이었다.
“짐이 도성을 정하여 설치하려고 한다.”
수로왕이 좌중에 둘러선 구간(九干)들을 향해 말했다.
--- p.39
가락국의 도성인 봉황성은 바닷길로 서해안과 남해안의 모든 항구, 그리고 한(漢)나라와 왜(倭)로 통할 수 있었고, 낙동강 물길을 이용해 영남 내륙 깊숙이까지 오갈 수 있었던 관문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른 가락국은 물길과 바닷길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관문을 차지해 물길ㆍ바닷길 교통, 그리고 교역의 요지로서 한반도 남부 변한의 소국들 가운데 맨 위층에 자리 잡게 되었다. 말하자면 철과 물길과 바닷길이 풀무질한 교역의 거점인 가락국은 천구(天球) 위에 구름 띠 모양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는 수많은 천체(天體)의 무리인 은하의 중심부처럼 변한 정치집단의 중심부가 된 것이었다. 관문사회의 중심 세력이 된 가락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소국일수록 교통과 교역의 중요도가 떨어져 낙동강과 남해 연안에 점점이 박혀 있는 소국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게 되었다. 반로국ㆍ감로국ㆍ접도국ㆍ고순시국ㆍ낙노국ㆍ주조마국 같은 소국들이 그러했다.
--- pp.72∼73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대회에 취재하러 갔다가 사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금 교수를 만나, 그의 「금관가야 사회의 발전과 경제」라는 논문을 한 편 얻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논문의 본론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숭신기(崇神紀)」 65년 조 기사를 먼저 소개하고 있었다.
임나는 쓰쿠시노 쿠니(筑紫國)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任那者(임나자), 去築紫國二千餘里(거축자국이천여리),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북조해이재계림지서남).
쓰쿠시노 쿠니는 지금의 후쿠오카(福岡)이고, 계림은 신라를 가리킨다. 문제는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라는 기사다. 지금의 김해시 지역과 그 인근 지역에 관한 고고학과 지리학 연구에 의하면 현재의 김해평야 대부분은 신석기 중기에 형성된 ‘고 김해만(古金海灣)’이라고 부르는 바다가 깊숙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주남저수지 일대도 기원전 1세기 다호리고분군 축조 세력이 자리를 잡았던 ‘고 대산만(古大山灣)’이라는 큰 만(灣)을 이루고 있었다.
금 교수는 『일본서기』「숭신기」 65년 조 기사가 고대 김해 지역의 지리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pp.101∼102
가야 관계 기사는 1970년대 말부터 간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봇물이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부산, 대구, 경상남도 일원의 대학들이 가야 고분에서 수많은 가야 유물을 발굴했다는 소식이 신문과 방송마다 뉴스로 크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가야 관계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유물 발굴 기사 첫머리나 끝에 반드시 ‘일본’과 ‘임나일본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5세기 무렵 가야와 일본 간의 문화 교류 양상을 알려준다’, ‘일본에 문화 수출 결정적 입증’, ‘고대문화 일본 전파 중심지’에서부터 ‘임나일본부 허구성 입증’, ‘일본의 임나 지배설 허구’, ‘임나일본부설 허구 자인’에 이르기까지 가야 관계 기사는 온통 일본에 영향을 끼친 유물이라느니, 임나일본부의 허구성을 입증했다느니 하는 꼬리표가 꼭 붙어 다녔다.
--- pp.112∼113
이뇌왕과 비조부의 누이 사이에 태어난 월광태자 대신 상수위(上首位) 고전해를 비롯한 친(親)백제계 신하들의 추대로 가실왕이 왕위에 올랐다. 친백제 대신들이 조정을 장악하자, 반로국은 다시 신라와 멀어졌다. 신라인의 피가 섞여 있는 월광태자와 신라 출신 비(妃)인 비조부의 누이는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비조부의 누이와 월광태자는 칠흑 같은 야음을 타서 황산하를 건너 신라로 달아났다. 신라는 반로국의 비와 월광태자로부터 반로국의 사정을 샅샅이 듣게 되었다.
--- pp.197∼198
그 후 우륵은 세 제자에게 자신이 지은 12곡도 가르쳐주었다. 우륵이 작곡한 12곡을 배운 세 제자는 12곡이 번잡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우륵은 이 소식을 듣고 제자들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아 눈알이 곤두섰다. 그러나 새로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에는 눈물을 흘렸다.
“공자께서 ‘『시경』의 「관저(關雎)」는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프면서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즐거우면서도 지나치게 즐겁지 않고, 슬프면서도 지나치게 슬프지 않구나. 이것이 정말 바른 음악이로구나.”
우륵이 말했다.
--- p.282
“이 책은 내가 자동차 정비공을 하며 교원검정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에 보던 책인데 민기오, 너에게 주마. 독학하다 보면 앞이 꽉 막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닥칠 때도 있을 거야. 그때마다 역사책을 읽어라. 역사책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이 세상을 살아가던 모습은 너가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는 데 큰 도움을 줄 거야.”
말을 끝낸 교감선생이 백영사에서 나온 『국사대관』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 p.317
다라국과 기문국은 「양직공도」 백제국사전에 “백제 곁에는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上己汶)?하침라 등과 같은 소국이 있고, 이들은 백제에 부용하고 있다”라는 기사에 각각 ‘다라’와 ‘상기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하얀 턱수염과 개량한복이 불쑥 튀어 나왔다. 원전 판독력이 어찌 그 모양이냐? 그 글자가 상사문(上巳文)이지, 상기문(上己汶)이냐? 텔레비전 카메라가 계속 돌아갔다. 야, 상갓집 개만도 못한 친일 사학자놈들아. 카메라가 개량한복을 향했다고 느끼는 순간,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