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인천역 광장에 버려진 그의 인생유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양부와의 유년기 시절을 거쳐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양부가 세상을 뜨자 다시 ‘진짜 고아’로 살아야 했던 소년기 시절과 청년기 시절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술했다. 이어 운명처럼 만난 아내(박계숙)와의 사랑 속에서 난생 처음으로 따뜻한 가정을 이룬 과정과 (주)유공 소속의 유조차 운전기사를 거쳐 1990년대 초 자신의 사업을 일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여정을 톺아냈다. 또 수원시민으로 살며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수원시장학재단에 장학금 1억 원을 쾌척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가로서의 면모를 자세히 소개했으며, 자신의 뿌리 찾기 집념과 민족혼 고취를 위해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에 적극 뛰어든 그의 최근 모습까지 생생하게 묘사했다.
--- pp.9~10 「들어가며 : 표지설명에 부쳐」중에서
“내가 마흔 넘어서 아주 우연한 기회로 갓난아기 때 젖을 물려준 남씨 아주머니란 분을 알게 됐지요. 인천에서 나를 데리고 덕적도로 들어간 김형숙 아버지 부부가 젖동냥을 구한 모양이에요. 마침 남씨 아주머니란 분이 애를 낳아 자기 자식한테 젖을 먹이고 있었는데 인심이 좋아 나도 같이 물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을 찾아갔지요. 그러니까 그게 덕적도를 떠난 지 30년도 더 됐을 때예요. 여차여차해서 찾아왔다고 하니까 단번에 기억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큰절을 올렸어요. 거기서 내 나이를 거의 확실하게 알게 됐습니다. 같이 젖을 물렸던 그 집 아들이 53년생이래요. 그러니까 내 출생연도도 53년이나 54년쯤 되었겠죠. 그래서 호적 나이는 55년, 실제 나이는 54년이다, 이렇게 생각하곤 환갑도 2014년에 그 계산으로 치렀고, 칠순도 2024년으로 잡자, 그렇게 마음먹게 됐죠. 아들보다도 내가 젖을 더 잘 먹었다는 얘기를 남씨 아주머니한테 듣다보니 얼마나 울컥하던지, 에휴.”
--- pp.41~42 「외로운 섬」중에서
재옥은 방학 내내 이발소 앞을 서성였다. 자기보다 서너 살은 더 먹었을 ‘따꺼’의 손놀림이 이제는 어느 정도 파악됐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이발소 풍경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대머리 ‘깎새 김씨’의 가위손이 풍금 치는 선생님의 손가락보다 더 멋졌다. 그 옆으로 나란히 앉은 넉 대의 다른 이발의자에서도 현란한 손기술이 펼쳐졌다. 이발소 한쪽 구석에서 따가운 햇살을 받아가며 열심히 구두를 닦는 ‘따꺼’의 호호 부는 입술도 친근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 손님들의 머리를 감겨주는 ‘감캐’ 역시 비누 거품 놀이가 즐거운지 온종일 벙긋거렸다. 재옥은 무엇보다도 ‘따꺼’ 옆자리의 깡통에 관심이 컸다. 시간이 갈수록 5원 권 지폐가 수북이 쌓였다. 그리고 해거름녘 도장에 갈 때쯤엔 그 돈들이 정갈하게 포개져 고무줄로 묶이곤 했다. 화폐개혁(1962) 직후라 모든 지폐가 빳빳했다. 재옥은 그 모습이 부러웠다. 그러면서 기회가 오면 반드시 ‘따꺼’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결심했다. 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이 그의 심장에서 요동쳤다. 그런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따꺼’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며 작업화로 신는 아버지의 군화를 손질했다.
--- p.69 「불안한 행복」중에서
어느덧 그의 나이도 17세에 이르렀다. 유행가의 변화처럼 그사이 그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이발소에서 목욕탕으로 이직했고, 삶의 공간도 하인천에서 주안으로 옮겨 왔다. 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년 늦게 야간중학교에 등록했고, 태권도장도 목욕탕 근처로 옮겨 와 사실상 양부와 지냈던 하인천 시대를 마감했다. 그 사이 주먹 또래들과 깍두기머리 형님들과 90도 꺾기로 인사하는 후배들이 많아졌다는 점도 큰 변화 중의 하나였다. 그의 이름 석 자는 이미 인천과 주안 지역은 물론 멀리 부평과 부천, 김포 뒷골목에서도 유명했다. 또 서너 살 위까지는 맞먹었고, 계보 있는 중간보스들과만 어울렸으며, 여러 계파에서는 나와바리가 없는 그를 영입하고자 많은 공을 들이기도 했다. 그가 입빠르게 유명세를 탄 건 하인천 시절의 여러 무용담들 때문이었다.
--- pp.98~99 「절제된 주먹」중에서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는 얘기였다. 그건 학교 교사나 학원 교사뿐만 아니라 도장 사범도 마찬가지였다. 보람도 크지만 신경 쓸 일도 많았다. 특히 예민한 시기의 10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건 고도의 경륜이 필요했다. 운동 쪽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학교 운동부는 그나마 ‘까라면 까는’ 시대였다. 하지만 사설학원 격인 도장은 갈수록 학부모들의 참견이 심해져 수련생 관리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1977년까지 이 일을 즐겼다. 열여덟 살에 시작한 사범 일이 스물두 살까지 이어지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고, 전국 대회 수상자들도 대거 양산했다. 또 개인적으로도 이 시기 전국 고교 태권도 대회에서 매년 좋은 성적을 거둬 체육특기자로서의 임무에 충실했고, 덕분에 유승원 사범의 입지도 덩달아 올라갔다. 그 사이 그는 군(軍) 초청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하며 고아로 면제된 군복무의 한을 풀기도 했다. 군대에서는 강화와 김포 지역은 물론 멀리 백령도와 양평, 포천 지역에서까지 그를 초청했다. 그때마다 잘 단련된 체력으로 장병들의 기선을 제압했다
--- pp.133~135 「태권, 직업이 되다」중에서
1982년 유공에 입사한 그의 직함은 ‘대리’였다. ‘따꺼’(11세)로 출발해 ‘보일러공’(14세)과 ‘사범’(18세)과 ‘관장’(22세)으로 이어진 그의 삶은 ‘대리’(28세)로 다시 시작됐다. 그러나 유공 유조차 운송부 내에서는 회사 직함 ‘대리’보다 조직 내 직함 ‘군기반장’으로 더 유명했다.
--- p.168 「가화만사성」중에서
그는 1992년 가을과 초겨울을 보내면서 경영 전략을 다시 짰다. 다른 경쟁 업소들과 완전 차별화된 배달 방식을 택해, 말로 전하는 양심 장사보다 눈으로 확인해 주는 양심 경영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소형유조차 홈로리 구입을 서둘렀고 금성계전이 개발한 ‘판매 금액 표시 주유기 장착’까지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이로써 1992년 연말, 수원 최초의 ‘소형유조차’가 [대림석유] 마크를 단 채 당당하게 수원 골목을 누비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됐다.
--- pp.200~201 「재종공취이방장」중에서
“김 회장님을 모시고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가장 많이 본 아름다운 모습은 어렵게 사는 노인들을 못 본 척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따뜻한 면입니다. 길가에서 채소를 파는 노인들을 보게 되면, 차를 세우라고 하곤 나가서 ‘할머니 이거 다 얼마예요? 이거 저한테 다 파시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세요.’ 이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게 돈만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김 회장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 스스로에게도 가끔 물어보곤 했어요. 너도 저렇게 할 수 있니? 그때마다 고개를 흔들게 되더군요.”
--- p.223 「이호세 사단법인 민족대표 33인 기념사업회 이사의 설명」중에서
1990년대 10년 동안 주유소 운영을 꿈꿨던 김재옥 사장은 마침내 47세 시절이던 2001년 10월 31일, [대신자연에너지]란 이름으로 자기 주유소를 갖게 됐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태장동(현, 영통구 신동)에 둥지를 튼 주유소는 그의 사업 감각이 빚은 또 다른 쾌거였다. 당시 주변 환경은 무척 썰렁했다. 그의 테니스 친구들은 주유소 적합지가 아니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의 촉은 주변의 우려와 달리 적중했다. 적막했던 도로가 차량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주변으론 시시각각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다. 저렴한 비용으로 주유소 부지를 사들인 데 이어 개업 이후 차량까지 북적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업 감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 p.248 「장학금 1억 쾌척」중에서
그는 수원상공회의소 회장 취임 즉시 조직 개편부터 서둘렀다. 우선 내부 조직을 ‘1센터 3팀’으로 개편해 업무의 전문성을 극대화하는 한편 수직 체계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임원실을 없앴다. 그리고 직원들 간의 원활한 업무적 소통을 위해 공간 구성도 효율성 있게 재편했다. 또 수원 관내 여러 기관들의 낙하산 인사 요청을 거절하며 특유의 뚝심으로, 오직 ‘업무 중심’, ‘능력 중심’만 보고 새로운 사무처장을 영입했다. 그는 또 사무처 직원들의 주인의식 고취와 소속감 증진을 위해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외주 처리해 왔던 상의 건물 내외부 환경 정리를 직원들이 직접 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많은 비용 절감이 있었고, 이를 바라보는 회원사들의 반응도 즉각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 p.299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중에서
그는 ‘민족대표33인유족회’를 찾은 이래 사무실 운영조차 어려운 형편이라는 걸 알고 또 다시 통탄했다. 가장 극진히 기려야 할 민족 대표 33인의 후손들인데,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할 때도 음식 값을 걱정해야 할 만큼 재정적으로 열악했다. 그래서 후원회장을 자처하고 2017년 5월부터는 매달 200만 원씩을 정기적으로 기부했다. 또 2018년부터는 100만 원을 올려 300만 원씩을 매월 후원하며 코로나-19 직전인 2020년 1월까지 총 1억 3,200만 원을 유족회에 기부했다.
--- p.356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 이사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