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쓰는 것은 못내 부끄러운 일이다. 책에 저자의 결함이 행간에 묻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결함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끝내 책을 위한 시간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결함이 묻어 있든지 말든지 간에 책만 내면 그만이라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쓰는 자의 첫 번째 미덕이 성실함이라면 두 번째 미덕은 부끄러움이라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그래서 이 두 권의 책은 20대에 연달아 책을 낼 수 있었던 기쁨인 동시에 20대의 부족한 글이 박제된 부끄러움이다. 하지만 그때만 가질 수 있었던 당당함과 간절함이 결함을 슬쩍 가려줄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여전히 그 모든 책에 존경과 사랑을 바친다. 2024년 봄 김겨울
--- p.8~9
우리는 인생의 그 어떤 부분도 피해갈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영화가 아니다. 기승전결을 갖춘 소설이 아니다. 잘 편집되고 이야기로 조직된 매끈한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기어이 1초, 1초를 온몸으로 통과해야 한다. 가장 행복한 1초든, 가장 고통스러운 1초든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시간은 같다. 그것은 때로 지루하고 자주 고생스럽다. 그러나 그 어떤 1초도 다른 이에게 의탁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거의 1초도 미래의 1초도 나의 몫이며, 나의 몫이어야만 한다. 그 온몸으로 밀어내는 시간이 층층이 쌓여 ‘나’라는 인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p.29
완전한 단독자로 서서 마주하는 세상은 그 어떤 가능성도 실현할 수 있는 자유의 세계이자, 책임이 나에게로 수렴하는 책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라고 울부짖어도 그것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매정한 답변이 주어지는 우연의 세계에서 운명보다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죄르지는 이야기한다.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고,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으므로,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고.
--- p.46
서로 다른 고통으로 연대한다. 인간에게 남은 선함이 있다면 이것이다. 완전히 다른 사례들에 무관심한 채로 그들을 뭉뚱그리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나의 행복이 타인의 고통 위에 세워지지 않았는지 성찰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나에게 주어진 고통이 없다고 할지라도 타인이 고통받지 않을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인간의 선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스템을 세우는 것. 공감이 결여된 사람마저 따라야 할 규범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럴 때 차라리 인간이란 이런 걸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싶고, 그런 것을, 조금 믿어보고 싶다.
--- p.62~63
선과 악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꼭 그만큼 악은 모든 곳에 숨는다. 현대는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불의를 저지르는 시대다. 현대의 악은 경제의 이름으로, 법의 이름으로, 합리의 이름으로, 집단의 이름으로, 알 수 없는 이름들로 온다. 관료와 상투는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확연한 악을 욕함으로써 선의 위치에 서기는 쉽지만, 은폐된 악을 발견해 행하지 않기란 훨씬 어렵다.
--- p.76~77
그러니까 홀로 있는 상태는 외로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혼자 있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독 자체는 선택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고독으로부터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고독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자신이 고독한 상태라는 자각은 무의식 속에 깔려 있다가 이따금 외로움, 쓸쓸함, 우울과 같은 감정을 얼굴로 하고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덮친다. 이 경험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밀어붙이면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세 가지의 고독이 된다.
--- p.98
창조하는 피조물이 비단 예술가뿐일까. 인간이 창조 없이 살아갈 수 있기는 한가. 자손을 낳지 않는 사람도, 불멸의 작품을 남기지 않는 사람도 어찌 되었든 자신의 삶을 만들어낸다. 아담과 하와가 죽음을 선물 받은 이래 모든 인간이 그랬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의미에서 삶의 창조자이며, 그렇기에 삶의 흔적은 언제든 그 주인을 호시탐탐 노리지만, 설령 그 흔적이 그 주인을 잡아먹더라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삶이든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므로. 내 삶이 나를 원망하게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 나와 다른 존재들의 삶이 잡아먹히지 않게 하기 위해, 아주 잠깐씩 환영처럼 등장하는 낙원을 등대 삼아 더듬더듬 나아간다.
--- p.136
이 반복은 가문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직선 위에 놓여 있다. 영원히 반복될 줄 알았으나 그 반복은 결국 멸망하여 허망하다. 그때 반복은 오히려 가문의 폐쇄성과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세계는 이와 정확히 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가 그리는 세계를 떠오르게 한다. 모든 것이 멸망하고 오로지 설국열차만이 지구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세상에서, 꼬리 칸으로부터 엔진 칸까지의 전진은 직선 운동처럼 보이지만 지구 단위로 보면 순환 운동일 뿐이다. 전진하고 진보한다 믿으며 앞으로 나아갔던 모든 노력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에 불과하다. 둘 다 허망하게 느껴지는데, 《백년의 고독》은 영원한 줄 알았던 가문의 멸망으로 마무리되고, 〈설국열차〉는 순환 운동을 박살 내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 p.169
때로 시간의 나이는 몇 살일지 생각해보곤 한다. 거대한 시간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갈수록 지나온 시간은 길어지고 남은 시간은 짧아진다. 그러므로 세상의 시작을 기준으로 하면 시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우리를 기준으로 하면 가장 나이를 먹은 시간, 그러니까 현재야말로 가장 새로운 시간이다. 과거나 미래로 멀리 나아갈수록 시간은 나이를 먹는다. 시간은 오랜 시간 살아왔는가, 오랜 시간 죽어왔는가.
--- p.185
소설은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이뤄주기도 한다. 소설은 내가 잠시나마 내 몸 밖으로 나가 타인의 삶을 살아보고, 우주를 유영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먼저 죽어보는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소설만이 지니는 이 권능 속에서 나는 삶으로부터 안전하게 도망친다.
--- p.209
인간은 세계를 인과론적으로 본다. A라는 사건이 B라는 사건의 원인이 되고, 다시 B라는 사건이 C라는 사건의 원인이 된다. 인과론은 세계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간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한다. 헵타포드들은 완전히 반대로 세계를 보고 있다. 그들은 이 세계 전체가 정해진 순서를 밟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은 정해져 있고, 그들은 순서대로 할 일을 한다. 목적론적인 세계관이다
--- p.231~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