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오빠의 와인 잔 주위로 날아드는 나방들을 쫓아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노신사 두 사람과 베르타, 신이 나서 지껄여 대는 파울,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고 혼자 떨어져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예쁜 투스넬데 그리고 자기의 ‘달변’에 자기가 도취된 가정 교사, 이 모든 사람이 다 사랑스럽기만 했다. 아직 젊은 나이여서 오늘과 같은 정원의 여름밤이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포근하고 유쾌한가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젊은이들과 현명한 두 노신사, 이들 모두는 앞으로 또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저 가정 교사를 포함해서.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삶과 생각 그리고 소망이 더없이 중요할 테지! 그리고 투스넬데 양은 또 얼마나 예쁜가! 정말 아름다운 처녀다.
--- p.36 「칠월」중에서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파울은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언가 우스꽝스러운 얘기나 바보 같은 얘기를 해 보거나, 아니면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손을 그대로 둔 채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서서히 숨이 차올라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분 좋았다.
투스넬데 양이 조용하고 약간 피곤한 눈으로 파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오른손 옆 벤치에 파울이 왼손을 바짝 갖다 댄 채 꼼짝도 않고 그것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 파울의 손 위에 얹어 놓았다.
그녀의 손은 부드러웠으나 힘이 있었고, 건조하면서 따뜻했다. 파울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라 떨기 시작했으나 손은 빼지 않았다. 그는 거의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그의 가슴은 격렬하게 고동쳤고, 온몸이 화끈거리는가 하면 동시에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그는 애원하듯,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pp.45-46 「칠월」중에서
집주인의 식탁에 놓일 음식인데 하녀가 잠시 이곳에 보관해 두었을 거라는 것쯤은 배고픈 그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광경에 눈이 뒤집힌 그는 자비로운 운명이 그에게 내려 준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부터 하게 되었다. 그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그 선물을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나 그가 막 그곳을 떠나려는 찰나에 손에 촛불을 들고 지하실 문에서 나온 하녀 바베트가 무뢰한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카를은 그녀가 부드러운 슬리퍼를 신고 소리 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미처 몸을 피하지 못했다. 젊은 도둑의 손에는 아직 치즈가 들려 있었다. 그는 꼼짝 못 하고 그 자리에 서서 땅만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고, 창피한 마음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촛불이 비추는 가운데 마주 서 있었다. 이제까지 용감한 소년의 삶에서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은 있었지만 이보다 더 치욕적인 순간은 결코 없었다.
--- p.70 「라틴어 학교 학생」중에서
사내아이들은 네 명이 짝을 지어 브뤼엘 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그들은 작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못된 짓을 모의하고 있었다. 한 명은 양철 테 코안경을 걸치고 있었고, 넷 모두 하나같이 사내들 특유의 멋을 부린다고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었다. 그때 한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그들을 앞질러 갔다. 그녀는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바구니를 팔에 끼고 있었는데, 바구니에서 검정 띠가 기다랗게 삐져나와 바람에 나부끼더니 땅에 끌렸다. 더러워진 띠의 끄트머리가 땅 위에서 이리저리 나뒹굴며 재미있게 춤을 췄다.
카를 바우어는 딱히 생각 없이 객기로 그 띠를 꽉 잡았다. 젊은 처자가 그것도 모르고 계속 걸어가는 동안 풀린 띠는 점점 더 길어졌다. 사내아이들은 그 광경이 재미있다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때 그 처녀가 돌아보더니 웃고 있는 사내아이들 쪽으로 번개같이 달려왔다. 블론드 머리에 예쁘장하고 젊은 그녀는 바우어의 뺨을 한 대 갈기고 늘어진 띠를 얼른 주워 담고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 pp.82-83 「라틴어 학교 학생」중에서
어느 날 저녁 우리 공장의 이 년 차 수습공이 집에 가는 길에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아직 애인이 없는 어떤 예쁜 여자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일러 줬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원하는데, 비단 주머니를 만들어서 나에게 주려고 한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자기가 말해 주지 않겠으며, 내가 직접 맞혀 보라고 했다. 내가 묻고 재촉하다가 마침내 허튼소리 말라고 하자 그가 걸음을 멈췄다. 우리가 멈춘 곳은 바로 강 위쪽 물레방아가 있는 곳이었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걔가 지금 바로 우리 뒤에 걸어오고 있단 말이야.”
나는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한편으로는 기대에 차서, 다른 한편으로는 놈이 쓸데없는 농담을 한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그런데 우리 뒤쪽에 한 어린 처녀가 방직 공장에서 나와 다리의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견진 성사 강독을 함께 받을 때 알게 된 베르타 푀틀린이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홍조를 띠었다. 나는 그만 뜀박질해서 집으로 달렸다.
--- pp.123-124 「회오리바람」중에서
정원과 운동장 그리고 구석진 곳 들이 한데 어우러진 고향 도시가 다정한 옛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교회 시계탑의 금빛 숫자는 자신을 보라는 듯이 번쩍거리고 있었고, 그늘진 물레방아 수로에는 집들과 나무들이 검은 그림자를 시원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나와 이 풍경 사이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서먹서먹해진 것은 오로지 내 마음의 동요 때문이었다. 담들과 강 그리고 숲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마을에서 나는 언제까지나 안일하게 만족하며 갇혀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장에 아직 강한 끈으로 묶여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 뿌리내린 채 우물 안 개구리로 살 수는 없었다. 이곳 어디를 가든지 좁은 경계를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동경으로 가슴이 들뜰 뿐이었다. 야릇한 슬픔에 젖어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문득 가슴속에 묻혀 있던 삶에 대한 내밀한 소망들이 일제히 용솟음쳤다. 아버지와 존경하는 작가들의 말씀이 내 은밀한 맹세와 더불어 귓전을 스치면서, 어른이 되어 내 운명을 내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 진지하고 값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이 생각은 한 줄기 빛이 되어 베르타 푀틀린으로 흔들리던 내 의지를 굳건히 해 주었다. 그녀가 아무리 예쁘고 나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행복이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자의 손으로 주어진다면,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 pp.126-127 「회오리바람」중에서
기차는 완만하게 굴곡진 철로를 따라 천천히 고갯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기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집들과 골목길, 강과 아래쪽 시내의 정원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또렷하게 보였다. 곧이어 나는 집들의 지붕을 헤아려 볼 수 있었고, 그중에서 눈에 익은 지붕들을 가려낼 수 있었다. 창문들도 셀 수 있었고, 황새의 보금자리들도 알아볼 수 있었다. 계곡을 바라보니 어린 시절, 소년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 왔다. 이런저런 옛일을 회상하는 동안 지금까지 품어 왔던 오만한 생각, 저 아래 고향 사람들에게 금의환향을 뽐내 보려던 내 오만한 생각은 어느덧 사라지고, 고향에 대한 감사, 고향을 다시 보는 감격으로 가슴이 벅찼다. 수년간 잊고 있던 향수가 기차에서 마지막 남은 십오 분 동안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플랫폼에 늘어선 금작화와 낯익은 정원 울타리 하나하나가 지극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들을 잊고 지낸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용서를 빌었다.
--- p.142 「청춘은 아름다워라」중에서
이즈음 헬레네가 여러 차례 우리 집에 왔다. 그녀는 내 여동생의 친구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언젠가 한 번은 숙부가 우리 모두를 자기 집 정원으로 초대했다. 커피와 과자 그리고 나중에는 구스베리 열매로 만든 와인도 나왔다. 막간에 우리는 어린애 같은 소소한 장난도 치고, 정원에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정원길이 어찌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지 우리의 행동거지가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헬레네와 안나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는 것도 그렇고, 동시에 내가 두 사람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기묘하기만 했다. 황홀하기 그지없는 헬레네 쿠르츠하고는 단지 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나는 아주 정중한 어조로 말을 한데 반해, 안나와는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흥분하거나 긴장되지 않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져 그녀가 고맙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시선을 돌려 보다 예쁜 헬레네 쪽을 줄곧 곁눈질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고, 다만 계속해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 pp.175-176 「청춘은 아름다워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