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예술작품은 그것을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강렬한 전복顚覆의 충동을 남긴다. 내게 그는 노는 법과 우는 법부터 먹고사는 법까지 모두 다시 시작하도록 기쁨과 용기(비눗방울 놀이 세트와 쌍절곤)를 주는 예술가이다. 그는 감각의 풍요로움과 예술적 폭발력, 역사적 비전을 그만의 방식으로 통합하여 추는 이와 보는 이(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뒤흔든다.
--- pp.8-9 「서문」중에서
휘황한 컬러와 요란한 장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이지만, 그의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코스튬은 단연코 민머리이다. (…) 그런데 그는 왜 민머리일까? (…) 간단하다. 사람들은(더욱이 여성은) 어지간해서는 삭발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은미에겐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 pp.27-28 「호랑이콩을 보고 당신을 떠올렸어요」중에서
예술가로서 별종 되기에 성공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기이한 행동이나 코스튬처럼 단지 외현적인 연출을 넘어 설득력 있는 전위를 만들어내는 일, 특정 장치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효과적이면서 필연적인 언어로 내용과 형식을 갖추기에 이르는 일 말이다. 그는 그저 민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사회의 욕망과 두려움, 그에 대한 해학을 보다 해방된 관점에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 p.30 「호랑이콩을 보고 당신을 떠올렸어요」중에서
맨발의 무용수들이 걷고 달리고 돌았다. 때론 천천히 때론 빨리. 움직임은 고요하고 분명했고, 절제되었지만 폭발적이었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낯선 파장이 툭, 내 안의 단단한 심지를 부러뜨렸다. 분명 몸으로 감각할 수는 있지만, 인식 안에서 해석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는 무엇이었다. 당황했다. 만져지지 않는 검은 불길처럼,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슬픔에 덴 것만 같았다. 그 불길이 강렬하지만 아득해서, 눈물이 흘렀고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 pp.33-34 「인생은 엉뚱하게」중에서
말 그대로의 로비, 내가 사랑하는 로비의 전형은 공연 포스터와 배너를 배경으로 분주한 티켓 부스, 그리고 상기된 얼굴의 사람들로 왁자한 광장과도 같은 공간이 아닌가! 잘 관리된 대리석 바닥에 높은 천장, 케이크 같은 샹들리에와 긴 창문이 늘어선 근사한 로비도 좋고, 사람이 하도 드나들어 반질반질해진 바닥에 별똥별처럼 박힌 조명이 공간의 깊이를 만드는 작고 컴컴한 로비도 좋고, 동네 회관처럼 소박한 공간에 공연 포스터가 덩그러니 붙은 심심한 로비도 좋다. 공간을 빼곡히 채우는 그 시간의 활기는 언제나 관객의 몫이다. 흥분과 기대, 애정과 환호, 존경심과 격려, 반가움과 아쉬움.
--- p.38 「로비의 루비」중에서
현대무용을 접하며 가장 낯설면서도 신기했던 점 하나는, 무대 위의 다양한 몸이었다. 현대무용에는 ‘무용수라면 어떤 몸이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기준이 없어 보였다. 작품과 무용단에 따라 각양각색의 개인과 몸이 있을 뿐, 무대 위에서 어떤 몸도 소외되지 않는다.
--- p.80 「몸몸몸」중에서
2000년대 이후 안은미의 작품에는 무용수로 저신장 장애인, 할머니, 시각장애인, 고등학생 등이 그야말로 와르르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대표하거나 한계를 극복하는 드라마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보여주러 나왔다. (…) 온전하고 순수한 몸이란 개념은 환상에 불과하다. 모든 몸은 자신이 거친 사회와 역사를 응축하고 있으며 젊고 건강한 신체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다. (…) 눈과 명치가 뻥 시원해진다. 무대 밖의 몸들이 보여주는 가능 세계 덕분에. 몸이 그대로의 몸으로 존재하는 세계. 몸과 나, 몸과 세계가 조건 없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
--- pp.81-82 「몸몸몸」중에서
여전히 옷 구경이며 옷 입기를 좋아하는 나는 무용수들이 무엇을 입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현대무용을 보러 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많은 무용 작품에는 관객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흥미로운 복식이 등장하고, 무대 의상에는 안무가의 고유한 철학과 작품 세계가 반영되어 독특한 뉘앙스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 오히려 무용수의 옷은 연주 중인 피아니스트의 흔들리는 머리칼과 비슷해 보인다. 무용수의 신체만큼이나 표현성을 지니며 때로 움직임만큼 강력한 표현 도구이자 표현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무용은 춤을 기본 언어로 하면서도 때론 옷이라는 사물이 몸과 움직임의 존재 방식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 실험하는 너그럽고 역동적인 현장이 되기도 한다.
--- pp.104-105 「무엇을 입을까 2」중에서
옷에 비유하면 무대는 현실의 내피이면서 꿈의 외피와 같은 공간이다. 공연은 주머니에 넣은 호두를 만지작거리듯 현실을 숙고하게 하는 곳이면서도, 우리의 상상과 이상에 외투를 입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공연장을 찾을 때마다 그곳에서 몸이 옷의 날개가 되고 옷이 몸을 해방시키는 모습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 p.109 「무엇을 입을까 2」중에서
안은미의 작품을 보는 즐거움 중 하나는 무용수들의 성별?의상?몸짓?소리의 크로스오버가 주는 해방감에 있다. 그는 작품에서 성별을 둘러싼 통념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연출을 시도해왔다. 그 횡단과 교차의 화려한 난장에서 화통한 심술이 느껴진다. 심술이 화통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의 작품에서 심술은 질문이 되고 선언이 되었다가 화룡처럼 멋지게 솟구친다.
--- pp.130-131 「렛 미 체인지 유어 네임」중에서
변신이 이토록 산뜻하고 기쁘고 리드미컬할 수 있다면,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평등하고 보다 자유로운 세상일까? 우리는 어떤 변신은 허용하고 어떤 변신은 불허하는가? 우리는 어떤 변신 앞에서 여전히 망설이고, 어떤 변신을 강요받는가?
--- p.132 「렛 미 체인지 유어 네임」중에서
어린 시절 나를 부드럽게 열어 흔드는 장소, 내 안에 춤이 일어나는 장소는 성당이었다. 지금도 성당에서 미사곡들을 듣고 부르는 순간에는 일렁일렁 나도 모르게 몸이 흔들린다. 지휘자처럼 손과 팔을 흔들며 눈을 감으면, 노를 저어나가듯 음악의 유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다. 옆에서 가족이 쿡 찌르거나(주로 엄마), 주변의 눈치가 보일 때는 발가락이라도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지 않으면 배길 수가 없다.
--- pp.156-157 「성전에서 춤을」중에서
미사에 춤이 차고 넘쳐도 무사하다는 사실을 아프리카의 미사가 증명한다. 말라위, 잠비아, 케냐의 미사 영상을 찾아보면 그곳의 미사는 그야말로 북소리와 춤으로 들썩거리는 흥겨운 축제 같다. (…) 어느 영상에서는 신부가 성전에 입장할 때 후광이 비쳐 깜짝 놀랐는데 다시 보니 신부 주위로 바짝 뒤따르는 복사 아이들의 함박 미소와 리드미컬한 춤의 신명에서 오는 빛이었다.
--- p.157 「성전에서 춤을」중에서
왜 무용에서 수행하는 반복, 특히 많은 사람이 하는 집단적인 반복은 쾌감과 함께 격정이나 슬픔, 때로 장엄한 예술성까지 느끼게 할까? 반복은 처음엔 똑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처럼 우리 주의를 끈다. 그러다 온 세상의 지붕을 세차게 두드리는 장대비처럼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끝없이 고양시킨다.
--- p.164 「장면들 3-사마귀 왈츠」중에서
춤은 몸을 풍요롭게 하고 폭력은 몸을 제약하고 파괴한다. 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폭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위계를 정하고 단절을 일으킨다.
--- pp.167-168「장면들 3-사마귀 왈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