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초가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처럼, 중국에는 국명이 없었다. 국명에 상당하는 한(漢), 당(唐), 명(明), 청(淸) 등은 권력을 장악한 일성(一姓)·일가(一家)의 왕조 명칭이었으며,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국민을 존중하는 양계초의 주요 취지에 반했다. 그래서 그는 왕조를 초월하는 통칭으로서 중화와 중국을 거론하며 최종적으로 중국을 선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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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사에 대한 일본인의 이러한 ‘지적 폐쇄’ 상황을 극복해 나아가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흔들리고 있는 중국, 중국사의 상(像)을 적확(的確)하게 파악하는 것은 필자에게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감정적인 논의에 빠지기 일쑤인 ‘혐중론’과는 선을 긋고, 우선 새로운 대국적·전체적인 논의와 인식을 이끌어낼 소재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양계초가 시작했던 ‘중국사’를 새로운 소재를 가지고 서술하여 ‘중국’ 및 ‘중국사’에 대해서 약간의 공통 인식을 이룰 수단을 제공해 보고자 한다.
--- p.16~17
춘추시대는 물론이고 한(漢)나라 시대의 임치에도 현대의 한족과는 다른 인간집단이 거주했으며, 또한 한자를 사용하고 고전 한어로 문장을 썼던 것이다. 제나라 인근의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유가(儒家)의 비조 공자(孔子)는 마침 2500년 전에 제나라에 체재했으며, 소(韶)라고 하는 고전 음악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3개월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한다. 억측을 해본다면, 특이한 풍모를 지닌 것으로 전해지는 공자도 차(茶) 색깔의 눈, 좀 더 말한다면 푸른색 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p.25
이리두 만기(晩期)에 속하는 유적에서는 소도(小刀)·추(錐) 등의 도구 종류, 월(鉞: 큰 도끼)·과(戈: 창) 등의 무기, 작(爵: 술잔)·영(鈴: 방울) 등의 예기(禮器) 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중국 상호작용권 중에서 최초로 금석 병용(金石倂用) 시기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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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 말기부터 서주 시기에 걸쳐서 공헌제는 봉건제로 진화한다. 봉건(封建)이라는 말이 서주의 당초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봉건이라는 용어는 『춘추좌씨전』에서부터 발견되기 시작한다. 봉건은 오히려 그 실태가 변용하여 형해화되었던 전국 시기부터 한(漢)나라 시대에 걸쳐서 형성된 용어이다. 당초에는 단순히 봉(封)이나 건(建)으로 표현되는 일이 많았다.
--- p.49
맹자는 또한 농가학파(農家學派)인 허행(許行)과의 토론 중에서 우(禹)가 제수(濟水), 탑수(?水)를 소통시켜 바다로 물을 흘러나가게 하며 여수(汝水), 한수(漢水), 회수(淮水), 사수(泗水)를 배수시켜 장강으로 흘러 들어가게 했기 때문에, ‘중국’이 농업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논한다(『孟子』 騰文公上篇). 이에 의하면, ‘중국’이 장강 이북의 화중·화북의 농경 사회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며, 이 영역은 또한 방(方) 3000리에 이르는 천하의 넓이와 거의 일치한다.
--- p.61~62
호적은 조세, 요역, 병역을 수취하기 위한 대장(臺帳)이다. 호적을 편성하는 단위인 호(戶)는 통상적으로 조세, 요역, 병역의 징수 단위이며, 납입 책임자인 호주는 진한(秦漢) 시대에는 호인(戶人), 당송(唐宋) 시대에는 호주(戶主)·호두(戶頭)·당호(當戶) 등으로 불렸다. 호적은 통상적으로 호주가 자신의 책임하에 자주적으로 신고하고, 세역(稅役)은 호(戶) 단위로 합산하여 일괄 납입되었다. 호적은 세역 수취의 형태에 따라 시대마다 기재 내용 및 양식을 달리한다. 하지만 그것이 호구·전토 장부라는 점은 그 이후 명(明)나라의 부역황책(賦役黃冊), 청(淸)나라의 편심책(編審冊)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일관되고 있다.
--- p.77~78
필자의 관견(管見: 좁은 소견)에 의하면, 최초로 ‘균전제’를 기술한 사람은 북송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다.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당나라 무덕(武德) 7년(624) 4월 항목에서 ‘무덕 7년령(令)’의 발포를 구실로 삼아 “처음으로 균전 조용조법(均田租庸調法)을 정했다”라고 표기하며 그 아래에 정남(丁男)·중남(中男)에 대한 1경의 급전(給田)과 조용조 수취의 규정이 서로 불가분의 제도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균전 조용조법’은 사마광의 조어이지 사료의 용어는 아니다.
--- p.129
구양수(歐陽脩)가 집필한 『당서(唐書)』 ‘병지(兵志)’의 간행 이래 약 1000년 동안, 당나라의 군제는 부병제뿐이었으며 부병이 위사·방인·행군 등 모든 군역을 담당했던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그 성과는 약간의 의심을 받는 일도 없이, 오늘날 세계사 교과서의 기술만이 아니라 국내외의 모든 당대사(唐代史) 전문 연구서에도 반영되고 있다. 당인(唐人)의 손으로 기록된 『대당육전』을 읽어보면, 당나라의 군제는 ‘12위-절충부-부병제’로 구성되는 중앙 남아금군의편성과지방 군제인 ‘도독부-진수-방인제’의 두 가지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역연하다. 주로 개원 연간에 시작된 절도사의 설치는 부병제의 붕괴로부터가 아니라, 도독부 진수제를 하나의 거점으로 삼아 새롭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과거 약 1000년 동안 계속되었던 오해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때이다.
---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