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토로지컬 모닝이란 말이 이렇듯 나름나름으로 심약하다고 할 수도 있는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증세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한테만 해당되는 무슨 특수한 병이기나 한 것처럼 버젓이 그 말을 기입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라면 석가보다도 더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아니할 수가 없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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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느 철학자는 사랑을 어떤 대상에 대한 관장된 심리의 지속이라고 했어요. 가령,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여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그 여자에 대하여 그 남자는 과장되게 예쁘다, 귀엽다, 착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그런 과장된 감정을, 길든 짧든, 지속하고 있는 상태라는 거지요. (이 소설은 통째로 읽혀야 합니다. '책속으로'가 필수 사항이여서 어쩔 수 없이 골랐지만 마치 토막난 시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책속으로'가 꼭 필요하지 않다면 등록시 '책속으로'의 내용은 제외해 주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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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실상이고 어느 것이 허상이냐고요? 그야 당연하지요. 죽지도 않은 내 아내를 죽었다고 하며 나에게 새 출발을 하라고 강요하는 처남은 허상이고, 그 반대의 처남은 실상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내 아내는 여기 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엄연히 살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허상은 끊임없이 출현하여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우리 부부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엇지요.
--- p.199
신통력요? 글쎄요. 스님한테 특별한 신통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신통력이라는 걸 믿지 않습니다. 인간 세상에 진실로 신통한 것이 있다면 과학 문명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들 외에 뭐가 또 있겠습니까? 전화만 해도 그렇지요. 아무리 멀고 외딴 곳에서라도 단추만 누르면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잤아요? 세상에 이보다 더 신통한 것이 뭐가 또 있겠어요? 내가 그 스님과 친한 것은 그분의 인자하면서도 호탕한, 그러면서도 현명한 성품과 지혜 때문이지, 그 분의 무슨 신통력 때문은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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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내가 이 도시에 온 것부터가 도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요? 허참!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는군요. 그런식으로 말한다면 미구에 닥칠 어떤 사건을 두고 도망 다닌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서 사람들은 이제 마음대로 여행도 할 수 없겠군요. 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에 여행의 자유가 없어진 거죠? 언제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전 허가를 받도록 된 거죠?
내일 아침이면 영장이 발부될 거라고요?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가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영장도 없는 부당한 인신 구속 상태에서 심문에 응할 의무가 나에게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밤에는 일단 나를 풀어주시오. 낯선 여행지에 아내를 혼자 버려둘 수는 없으니까요.
뭐라고요? 도주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어 그건 안 된다고요? 당신들은 정말 고집불통이로군요. 내가 도주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방금 설명했잖아요. 그리고 영장을 신청해 둔 상태라면 당신들은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런데도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어 날 풀어줄 수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내가 무슨 증거를 어떻게 인멸한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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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들고 있던 아령으로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 지긋 지긋한 처남의 허상을 향하여 말입니다. 처남의 허상을 제거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내가 만약 뒤를 돌아보면 그 허상은 다시 살아나 엉뚱한 말을 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실제 내 처남이 죽었다니 하늘에 맹세코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건 다른 누군가가 한 짓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처남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중에 한 사람의 소행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처남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은 대부분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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