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 대신 죽은 사람은 생전에 구경하지 못한 리무진을 타고 화장터로 향한다. 화장지에 도착하면 죽은 이는 불가마에 들어가 두 시간도 안 되어 한 줌의 재로 변해 항아리에 담겨 상주 앞에 나타난다. 모든 것은 상조회사에서 맡아 하고 있어 상주의 슬픔도 예전 같지 않다. 슬프게 우는 상주도 보기 힘들다. 화장 문화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아직도 양지바른 남향 쪽이면 어김없이 죽은 사람이 차지하고 누워 있다. 앞으로는 이들도 화장되어 봉안당으로 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김 씨 일행은 윤달이 드는 해에 일거리가 많다. 사람들은 보통 달에는 파묘를 하기 위해서 손이 없는 날을 따져야 하지만 윤달이 드는 해는 그럴 필요가 없다. 윤달은 4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데 사람들은 윤달을 그해 없는 달로 취급하여 길일을 따질 필요 없이 아무 때나 묘에 쟁기를 대도 탈이 없다고 믿었다.
남 씨는 남의 집 파묘를 하는 날에는 마음이 울적해지며 서울에 사는 아들 생각이 간절했다. 자기가 세상을 하직하는 날 와서 눈물을 흘려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다. 자식과 인연을 끊고 산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재산 문제도 아니고 제사 문제 때문이었다. 삼 년 전 일이었다. 남 씨는 추석날 아침 서울에서 온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함께 차례를 지낸 후 성묫길에 나섰다. 남 씨는 나이가 많아 가파른 산길을 오를 때면 무릎이 아파도 자식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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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은 이런 전화를 받은 후 처음으로 농사일하다가 흙 속에 파묻혀 죽을 수 없다고 결심했다. 이미 마음은 서울에 가 있으니 밭일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어머니는 경숙의 이런 마음을 모르고 봄바람이 살랑거리니 마음이 들떠 그러는 줄 알고 야단쳤다.
“자식아, 너도 봄 타냐?”
“엄마.”
“일하기 싫으면 밥을 먹지 말아야지.”
경숙이 입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지금 세상에 밥 못 먹는 사람도 있어? 라면이라도 먹으면 되잖아.”
경숙은 일밖에 모르는 어머니에게 이종사촌 언니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요즘 경숙은 일터에 나가면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한숨도 푹푹 쉬며 헛소리하듯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 꼴을 보고 있는 어머니는 일은 하지 않고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느냐고 야단쳐도 소용이 없었다. 경숙은 생각 끝에 어머니에게 슬쩍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엄마, 농사일해서 어느 천년에 돈을 벌 건데?”
“자식아, 누군 농사일이 좋아서 하는 거냐? 먹고살려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돈을 언제 벌어서 나를 시집보낼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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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선창가는 종일 부산하게 움직였다.
배에서 나는 통통거리는 엔진 소리, 어부들의 고함치는 소리, 여기저기서 손님 부르는 소리, 선창가 주변 공사 현장에서 굴착기 돌아가는 소리,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 선창가는 여러 가지 합창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태수도 일거리가 생기자 살맛이 났다. 태수는 해마다 추석 명절이면 푸짐한 선물을 들고 고향 집에 다녀오곤 했는데 몇 해 못 갔다. 올해는 고기가 돌아오고 일을 할 수 있어 고향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동안 고향에 못 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자 태수 아버지는 혼자 오는 태수를 향해
“자식아, 너는 고자도 아니면서 남들이 하는 연애도 못 하냐?”
하고 야단칠 때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마다 태수는 불평 섞인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요즘 여자들은 돈이 없는 남자들은 쳐다보지도 않소.”
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듯한 소리를 하면 아버지는 “임마, 나는 느 어미하고 돈이 없어도 결혼했어.” 하고 큰소리쳤다.
“옛날이야기를 하지 마슈, 지금은 옛날이 아니오.”
그 말속에는 은근히 아버지를 원망하는 듯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태수 아버지가 한마디 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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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춤을 추는가?”
“거리가 멀다네.”
“공부는 우등생이지만 사회에서는 우등생이 못 되는구먼, 그럼 술이나 드세.”
“그러지.”
음악이 빠른 곡에서 느린 곡으로 넘어가자 요란하게 움직이던 인파가 조용해지며 남녀가 서로 품에 안고 춤을 추었다. 홀 안은 큰 물결이 일정한 방향으로 출렁대며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민우가 술잔을 홀짝거리며 박동수에게 말을 했다.
“자네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나?”
뜬금없는 소리였다.
“싱거운 질문이구먼.”
“그런가, 저 무리 속에 자네 부인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행동하겠나?”
강민우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박동수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술맛 떨어지는 소리 그만하게, 우리 집사람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럴 일이 없을 테니까 안심하게.”
“마누라를 철저하게 믿는구먼.”
“믿네, 결혼 이십 년일세.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네.”
강민우는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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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후문 쪽 담에 기대어 옆으로 긴 판자로 된 탁자가 놓이고 그 앞에 네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간이 술상 테이블이다. 가게가 좁아 강릉댁이 임시로 만들어 놓은 식탁이다. 오래전부터 이곳에는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노인이 매일 만나 술을 마시며 인생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박 노인과 송필 노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두 노인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이곳을 찾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마누라에 대한 불만, 자식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박 노인은 높은 관직에 있다가 퇴직했고 송필 노인은 마누라 덕에 먹고사는 인생 낙오자다. 송필 노인은 한때 사업을 해서 돈을 벌기도 했으나 아이엠에프로 망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살아온 길이 달라도 이곳은 두 노인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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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이의 바람기는 해마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면 잊지 않고 찾아왔다. 여자가 봄을 탄다는데 이 집은 그 반대로 남자가 봄을 타는 것 같았다. 여주댁은 농사일이 바빠 봄이 와도 꽃이 언제 피었다가 언제 지는지 알 수 없었다.
봄이 오면 오봉마을은 씨앗을 뿌리랴, 밭에 두엄을 내랴, 배추 모종을 하랴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 고산 지대여서 봄이 짧아 봄이 왔는가 싶으면 산에 나무가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을 더해갔다. 특히 오봉마을의 봄은 평지의 봄과 격차가 더욱 심했다. 단오(端午)를 앞둔 절기면 나무들이 겨우 새순이 파릇파릇 돋을 테지만 요즘은 여름처럼 푸르렀다. 기후 변화로 봄이 짧아지고 여름이 빨리 오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오봉마을 농사일은 더욱 바쁘게 서둘러야 한다.
팔복이는 농사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늘도 한껏 멋을 부리며 읍내로 나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특별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휘파람을 불고 콧노래까지 부른다.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여주댁은 가슴에서 천불이 났다.
오봉마을은 농사일도 평지보다 더 빨리 시작해야 하고 가을걷이도 더 빨라야 한다. 봄이면 밭에 두엄도 일찍 내야 하고 파종도 일찍 해야 하지만 팔복이는 농사일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농사일밖에 모르는 팔복이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돈이 생기면서부터였다. 돈이 사람을 망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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