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樂)’의 기원
음악의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그 기원과 성격을 둘러싼 논의는 분분하다. 음악의 기원에 대한 해석을 크게 정리하면 인간의 즐거움과 쾌락 등의 원초적 감정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유희(遊戱) 기원설이 제기되었고, 신을 향한 고대인들의 일련의 의례에서 음악이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제사 기원설도 설득력이 있으며, 노동의 현장에서 집단적으로 음악이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노동 기원설도 유의미하다. 한편 음악도 일종의 표현과 소통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언어 기원설도 가능할 것이다.
어느 문명을 막론하고 음악이 특정한 기원으로만 성립하고 발전했을 리는 없으며, 대부분 복합적인 성격을 노정하며 발전하였다. 그 점은 고대 중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정한 기원에 매몰되기보다는 고대 음악의 다양한 속성을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선사시대 이전부터 인류와 함께했던 음악 문화와 악무(樂舞) 활동에 대한 고대인의 원초적 사유를 우리는 초기 문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고대 중국 사회는 문자를 창출하면서 구상적이든 추상적이든 ‘악(樂)’란 문자로 개념화하였다. 고대사 연구에서 문자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하면 ‘악(樂)’자의 기원과 성격을 논구하는 것은 적어도 역사시대를 전후한 시기 고대 중국인의 음악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시도가 될 것이다.
오늘날 한자문화권에서 ‘악’자는 ‘음악, 악기, 연주하다’라는 의미의 악(yue), ‘기쁨, 즐거움, 즐겁게 하다’는 의미의 락(le), 그리고 ‘좋아하다’는 의미의 요(yao) 등 다양한 용례와 발음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찍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악이란 오성五聲과 팔음八音의 총칭으로서 북[鼓]의 형상을 따른 것이며, 글자의 목부木部는 북을 거는 걸이[?]이다’라고 해석했다. 즉 약 2천 년 전에 편찬된 사전의 정의에 따른다면 ‘악(樂)’자는 아마도 군사적 혹은 의례용으로 사용되는 크고 작은 북의 형상을 모방한 문자라는 것이다. 중국음악사와 관련된 대부분의 논저는 서두에서 ‘악’자에 대해 나름의 분석과 해석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의견이 서로 분분하여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가장 오래된 고문자인 갑골甲骨에 기록된 ‘악’자를 검토해 보자. ‘악’자의 형상은 하부는 현재 ‘악’자의 부수이기도 한 커다란 나무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상부 좌우에 형상화되어있는 고문자 ‘?’는 일반적으로 실을 묘사한 ‘사?’자의 상형으로 알려져 있다. 즉 나무 걸개에 끈이나 실이 묘사된 자형이다. 한편 서주西周시대 청동 금문金文 상의 ‘악’자에는 상부 좌우의 ‘?’자 사이에 오늘날의 ‘백(白)’자의 초기 형태인 ‘?’자가 추가되었다.(〈그림 1-1〉) ‘?’자가 소리 울림통[鼓身]을 묘사한 것이라는 점에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갑골문 악자가 과연 《설문해자》에서 해설처럼 세워놓은 큰 북[鼓·?]을 형상화 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선 세워놓은 북을 매우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갑골문자 ‘고(鼓)’와 비교하면(〈그림 1-2〉), ‘악(樂)’자에서 그 북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무와 실’이 결합된 형상에 착안하여 악이 금슬琴瑟과 같은 현악기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하고, 전설상의 고성왕이 만든 고대악기가 금슬이었다는 일부 일화를 감안하면 일견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듬을 위주로 한 타악기가 가장 원초적인 악기이며 이후 관악기와 현악기처럼 가락과 음률을 조율할 수 있는 선율악기가 발전했다는 악기발전의 보편성은 물론이고, 악(樂)자와는 별개로 현絃을 손으로 타며 연주하는 형태의 갑골문이 별도로 기록된 점을 인정하면 오히려 악이 현악기에서 연원했다는 설은 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때문에 청동 금문에서 악자 중앙의 타원은 큰북[鼓]을, 양쪽의 작은 타원 모양은 작은 북[?]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으로 《설문해자》의 해석을 보완하는 의견도 있었으며, 또는 악기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고대 무의(巫醫)의 불제(?除)와 퇴마의식에 착안하여 ‘악(樂)’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무의가 흔들던 방울[鈴]에서 연원했다거나, 고대인들이 집체형식으로 악무를 하던 ‘뽕나무[扶桑]’계통의 신수(神樹)를 모방한 것이라는 등 새로운 견해들도 개진되었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입론은 모두가 고문자 악의 ‘형상’을 둘러싼 논쟁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중국 고대 문자의 상형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초기 문자의 상형성은 상형적 도상부호(圖象符號)에서 발전한 초기 문자 형성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만큼 고대인들의 소박하고 원초적인 문화와 관념이 온전히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때, 악자 또한 결국은 음악 활동과의 연관성을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악자가 악무 활동의 일면을 구체적이며 가시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려던 고대 중국인들의 고민의 결과임을 인정한다면, 그 악무 활동의 가장 구상적인 형식은 역시 악기가 가장 즉자적이며 용이한 표현 대상이었을 것이다.
타악기가 갖는 악기의 시원성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북[鼓]이 고대 중국의 가장 원초적 악기였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 산견되어 보이고 있다. 가령 고(鼓)는 신화 상의 고성왕 요임금의 악관(樂官)으로 동아시아 악관의 시조이기도 했던 기(夔)의 뼈와 가죽으로 만든 것이라고도 하며, ‘흙으로 빚은 북과 북채[土鼓??]’가 북의 원형이자 악기로 원형으로 상징되어 왔음은 유명하다. 하(夏) 나라에서는 북에 발이 있어 세워서 두드릴 수 있었고, 은(殷) 나라에서는 북에 축을 세워 연주할 수 있었다는 영고(楹鼓)를, 주(周) 나라에서는 걸개[架]에 줄을 달아 매다는 현고(縣鼓)를 사용했다는 고사들은 일견 고대 중국에서의 고(鼓)의 발전사를 일별하는 것 같다.
실제 고대의 북은 형태와 용도에 따라 다양했으며, 세워서 두드리는 큰 북 형태의 건고류建鼓類를 의미하는 ‘주(?)’ 혹은 고(鼓)’자는 물론이고, 남방지방의 북을 상형화하여 오늘날 남녘 남자의 원형인 ‘?’자가 이미 갑골문에 기록된 점을 감안하면 악자는 타악기 이되 또 다른 형태의 북을 형상화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악자를 북의 일종으로 본 《설문해자》의 고석은 충분히 재음미할 만하지만, 악자 좌우의 ‘실[?]’을 감안하면 역시 악자는 끈으로 연결된 북, 즉 현고류(懸鼓類)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가령 《주례周禮》에는 북을 전담하는 직무인 고인鼓人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고인은 뇌고(雷鼓)·영고(靈鼓)·노고(路鼓)·분고(?鼓)·고고(?鼓)·진고(晉鼓) 등의 여섯 가지 북[六鼓]을 관장하였다고 한다. 이들 북의 대부분은 목재의 걸개에 끈을 매달아 연주했던 통칭 현고(懸鼓)에 해당하는 북이라고 보아도 대과는 없다. 이들 현고의 초기 형태가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만 고대부터 북 문화의 전통을 현재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고 있는 남방지방의 문화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다.
음악의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그 기원과 성격을 둘러싼 논의는 분분하다. 음악의 기원에 대한 해석을 크게 정리하면 인간의 즐거움과 쾌락 등의 원초적 감정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유희(遊戱) 기원설이 제기되었고, 신을 향한 고대인들의 일련의 의례에서 음악이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제사 기원설도 설득력이 있으며, 노동의 현장에서 집단적으로 음악이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노동 기원설도 유의미하다. 한편 음악도 일종의 표현과 소통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언어 기원설도 가능할 것이다.
어느 문명을 막론하고 음악이 특정한 기원으로만 성립하고 발전했을 리는 없으며, 대부분 복합적인 성격을 노정하며 발전하였다. 그 점은 고대 중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정한 기원에 매몰되기보다는 고대 음악의 다양한 속성을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선사시대 이전부터 인류와 함께했던 음악 문화와 악무(樂舞) 활동에 대한 고대인의 원초적 사유를 우리는 초기 문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고대 중국 사회는 문자를 창출하면서 구상적이든 추상적이든 ‘악(樂)’란 문자로 개념화하였다. 고대사 연구에서 문자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하면 ‘악(樂)’자의 기원과 성격을 논구하는 것은 적어도 역사시대를 전후한 시기 고대 중국인의 음악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시도가 될 것이다.
오늘날 한자문화권에서 ‘악’자는 ‘음악, 악기, 연주하다’라는 의미의 악(yue), ‘기쁨, 즐거움, 즐겁게 하다’는 의미의 락(le), 그리고 ‘좋아하다’는 의미의 요(yao) 등 다양한 용례와 발음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찍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악이란 오성(五聲)과 팔음(八音)의 총칭으로서 북[鼓]의 형상을 따른 것이며, 글자의 목부(木部)는 북을 거는 걸이[?]이다’라고 해석했다. 즉 약 2천 년 전에 편찬된 사전의 정의에 따른다면 ‘악(樂)’자는 아마도 군사적 혹은 의례용으로 사용되는 크고 작은 북의 형상을 모방한 문자라는 것이다. 중국음악사와 관련된 대부분의 논저는 서두에서 ‘악’자에 대해 나름의 분석과 해석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의견이 서로 분분하여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가장 오래된 고문자인 갑골(甲骨)에 기록된 ‘악’자를 검토해 보자. ‘악’자의 형상은 하부는 현재 ‘악’자의 부수이기도 한 커다란 나무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상부 좌우에 형상화되어있는 고문자 ‘?’는 일반적으로 실을 묘사한 ‘사(?)’자의 상형으로 알려져 있다. 즉 나무 걸개에 끈이나 실이 묘사된 자형이다. 한편 서주(西周)시대 청동 금문(金文) 상의 ‘악’자에는 상부 좌우의 ‘?’자 사이에 오늘날의 ‘백(白)’자의 초기 형태인 ‘?’자가 추가되었다.(〈그림 1-1〉) ‘?’자가 소리 울림통[鼓身]을 묘사한 것이라는 점에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갑골문 악자가 과연 《설문해자》에서 해설처럼 세워놓은 큰 북[鼓·?]을 형상화 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선 세워놓은 북을 매우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갑골문자 ‘고(鼓)’와 비교하면(〈그림 1-2〉), ‘악(樂)’자에서 그 북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무와 실’이 결합된 형상에 착안하여 악이 금슬(琴瑟)과 같은 현악기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하고, 전설상의 고성왕이 만든 고대악기가 금슬이었다는 일부 일화를 감안하면 일견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듬을 위주로 한 타악기가 가장 원초적인 악기이며 이후 관악기와 현악기처럼 가락과 음률을 조율할 수 있는 선율악기가 발전했다는 악기발전의 보편성은 물론이고, 악(樂)자와는 별개로 현絃을 손으로 타며 연주하는 형태의 갑골문이 별도로 기록된 점을 인정하면 오히려 악이 현악기에서 연원했다는 설은 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때문에 청동 금문에서 악자 중앙의 타원은 큰북[鼓]을, 양쪽의 작은 타원 모양은 작은 북[?]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으로 《설문해자》의 해석을 보완하는 의견도 있었으며, 또는 악기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고대 무의(巫醫)의 불제(?除)와 퇴마의식에 착안하여 ‘악(樂)’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무의가 흔들던 방울[鈴]에서 연원했다거나, 고대인들이 집체형식으로 악무를 하던 ‘뽕나무[扶桑]’계통의 신수神樹를 모방한 것이라는 등 새로운 견해들도 개진되었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입론은 모두가 고문자 악의 ‘형상’을 둘러싼 논쟁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중국 고대 문자의 상형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초기 문자의 상형성은 상형적 도상부호(圖象符號)에서 발전한 초기 문자 형성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만큼 고대인들의 소박하고 원초적인 문화와 관념이 온전히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때, 악자 또한 결국은 음악 활동과의 연관성을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악자가 악무 활동의 일면을 구체적이며 가시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려던 고대 중국인들의 고민의 결과임을 인정한다면, 그 악무 활동의 가장 구상적인 형식은 역시 악기가 가장 즉자적이며 용이한 표현 대상이었을 것이다.
타악기가 갖는 악기의 시원성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북[鼓]이 고대 중국의 가장 원초적 악기였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 산견되어 보이고 있다. 가령 고(鼓)는 신화 상의 고성왕 요임금의 악관(樂官)으로 동아시아 악관의 시조이기도 했던 기(夔)의 뼈와 가죽으로 만든 것이라고도 하며, ‘흙으로 빚은 북과 북채[土鼓??]’가 북의 원형이자 악기로 원형으로 상징되어 왔음은 유명하다. 하(夏) 나라에서는 북에 발이 있어 세워서 두드릴 수 있었고, 은殷 나라에서는 북에 축을 세워 연주할 수 있었다는 영고(楹鼓)를, 주(周) 나라에서는 걸개[架]에 줄을 달아 매다는 현고(縣鼓)를 사용했다는 고사들은 일견 고대 중국에서의 고(鼓)의 발전사를 일별하는 것 같다.
실제 고대의 북은 형태와 용도에 따라 다양했으며, 세워서 두드리는 큰 북 형태의 건고류(建鼓類)를 의미하는 ‘주?’ 혹은 고(鼓)’자는 물론이고, 남방지방의 북을 상형화하여 오늘날 남녘 남자의 원형인 ‘?’자가 이미 갑골문에 기록된 점을 감안하면 악자는 타악기 이되 또 다른 형태의 북을 형상화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악자를 북의 일종으로 본 《설문해자》의 고석은 충분히 재음미할 만하지만, 악자 좌우의 ‘실[?]’을 감안하면 역시 악자는 끈으로 연결된 북, 즉 현고류(懸鼓類)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가령 《주례周禮》에는 북을 전담하는 직무인 고인鼓人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고인은 뇌고(雷鼓)·영고(靈鼓)·노고(路鼓)·분고(?鼓)·고고(?鼓)·진고(晉鼓) 등의 여섯 가지 북[六鼓]을 관장하였다고 한다. 이들 북의 대부분은 목재의 걸개에 끈을 매달아 연주했던 통칭 현고(懸鼓)에 해당하는 북이라고 보아도 대과는 없다. 이들 현고의 초기 형태가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만 고대부터 북 문화의 전통을 현재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고 있는 남방지방의 문화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다.
---「1악장 음악의 기원과 성격」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