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쓴 글은 단 한 편도 없다. 조금 열심히 자료를 찾고 꽤나 부지런히 인터뷰를 해서 그것을 최대한 성의껏 한 편의 글로 엮어낸 것들이다. 이 글들을 통해 다른 지역의 독자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에 적용될 수 있는 시사점을 발견하고, 일정한 노하우도 확인하며,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나가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p.9, 「들어가는 말|피어라, 머내여지도!」중에서
그 용인 지역 가운데 험천, 즉 현재의 우리 동네 ‘머내’는 조선 시대에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용인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동네였다. 아마 이곳을 지나 광주 지역에 들어서면 ‘이젠 곧 한양이다!’는 심리적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실제 옛 광주의 많은 지역이 이제 서울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와 반대로 한양에서 영남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머내’는 용인 지역에 들어와서 처음 마주치는 동네였다. 한양을 떠나 이제 본격적으로 지방 행로에 돌입한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으리라.
--- p.23, 「제1장|‘머내’가 도대체 어디 있는 동네인고?」중에서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 동안 농업사회였던 머내가 달라졌다. 1968년 서울-수원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머내의 코앞으로 지나가고, 1972년 머내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이곳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해외섬유가 들어선 것을 필두로 하나둘 공장들이 생겨났고, 어느새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올라왔다. 공장 일 마치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토요일 머내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머내의 식당과 술집들은 다양한 지방 사투리들이 뒤섞인 가운데 불야성이었다. 밤이 깊을수록 젓가락 장단에 맞춘 유행가 소리도 커지고, 어디선가 술주정 소리도 들려왔다.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한 동천리에 공장이 들어서며 머내는 용인 변두리 외딴 동네에서 소규모 산업도시로 급격히 변모해 갔다.
--- p.77, 「제5장|끝없이 흘러가는 마을, 동천동」중에서
가톨릭 측 기록에 따르면 손골은 여러 교우촌 중에서도 그 의미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비밀리에 국내로 들어오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곳에서 적응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페롱, 조아노와 칼래, 오매트르, 도리 신부 등 적어도 다섯 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이들은 짧게는 반년, 길게는 1년 반 정도 손골 교우촌에 머물며 한국어도 배우고, 한국의 풍습도 몸에 익혔다. 그렇게 해서 한국인 신자들과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지고 성사도 행할 정도가 되면 이 선교사들은 새로운 임지로 떠나가고, 손골에는 또다시 한국에 새로 배정된 신임 선교사가 찾아들곤 했다.
--- p.143, 「제8장|손골 교우촌의 성립과 역사」중에서
그때 안종각, 이덕균 등이 미리 준비한 대로 우리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일장 연설을 하고 “조선 독립 만세!” 제창으로 그 연설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100여 명의 고기리 주민들은 나라 없는 세상에서 일본 관리와 헌병들에게 억눌려 10년 동안 살아온 한을 이렇게 목청껏 외치는 ‘독립 만세’로 풀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기리 주민들은 머내만세운동의 시작 집회를 마치고서 오전 9시경 사전에 약속된 대로 대열을 지어 대로변의 동천리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당시는 고기리와 동천리 사이의 낙생저수지가 설치되기 전으로, 지금의 낙생저수지 바닥쯤에 있었던 두 마을의 연결 도로를 따라 때로는 걷고, 때로는 뛰면서 다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을 것이 틀림없다.
--- p.234, 「제12장|머내만세운동 이야기」중에서
그날 그는 ‘달팽이’를 ‘딸팽이’라고 불렀다. ‘ㄷ’이 왜 된소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두어 시간 대화 속에 ‘딸팽이’를 포함해 처음 듣는 토속어를 서너 개나 선보였다. 그는 자연 속에, 농사 속에, 과거 속에 머물다 툭 튀어나온 인물 같았다. 그만큼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표현하면 좀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는 ‘걸어 다니는 머내박물관’이었다. 성일영 씨는 1931년 동막골에서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아흔이 넘었다. “해방 전에 부모님 따라서 만주에 가서 7년 살고, 단기 88년(1955)에 군대 가서 44개월 근무한 것 빼고는 줄곧 동천동이나 그 주변에서 살았다”라고 했다. 지금도 그는 동문3차 아파트에 살면서 동막골에서 농사를 짓는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도토리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 p.335, 「제20장|동천동 최후의 수로관리인 성일영 씨」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