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21일 동안 성경책을 읽다 지쳐 잠든 새벽에 꿈을 꿨다. 풀이 무성한 묵정밭 끝에서 작은 광채가 떠올라 점점 다가왔다. 바람이 불어 옷깃이 깃발같이 휘날렸다. 태양보다 더 눈부신 광채에 눈을 가렸다.
“현준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야. 공부 못해도 괜찮아. 꼴찌면 어때. 가난하다고 주눅들 거 하나도 없어.”
“바보 같은 사람도 가장 귀하나요? 전 아무런 꿈이 없어요. 꼭 날개를 다친 어린 새 같아요.”
“성경은 마음을 바꾸지. 너의 열매를 보고 싶어. 쟁기를 잡고 인생의 밭을 갈아. 오직 너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지켜볼게. 타고난 기억력을 버리지 마. 내가 너에게 준 선물이니까.”
무섭고도 달콤한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여덟 살에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 바보로 산 날들이 필름처럼 하나둘씩 지나갔다. 아이가 사경을 헤매다 정신을 잃는 장면, 책가방에 전교 꼴찌 성적표를 넣는 장면, 선생님에게 머리를 맞는 장면, 비탈밭에 고추 모종을 심는 장면, 연탄재가 날리는 동네로 이사하는 장면, 저녁 강변에 앉아 강물을 보는 장면, 수박밭에서 땀을 닦는 장면, 어머니에게 살구를 건네는 장면… 햇살에 장면들이 하르르 부서졌다. 창문 너머 14년 만에 새로운 하늘이 밝아왔다. 물속으로 가라앉은 행복의 해를 수평선 위로 띄워 올리고 싶었다. 가난한 농부의 마음에 꿈이 생겼다.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어도 좋은 꿈이다.
--- pp.25~26
평범하게 살고 싶은 여자, 목회자로 살고 싶은 남자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천주교는 무엇이며 개신교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누구며 하나님은 누구인가? 고향 마을에 성당이 있었다면 신부가 됐을지 모르고, 사찰이 있었다면 머리 깎고 승려가 됐을지 모르지만, 생각과 마음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평범한 삶은 별처럼 아득히 멀고 해나도 나도 눈이 멀어 가는 현실이 버겁다.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이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눈빛을 알아챈다.
“저짜 있어. 연탄 연기 올라온데이.”
“연탄 가는 거 궁금하단 말이야, 볼래.”
아궁이 맨 밑에 집게로 불붙은 연탄을 넣고 연탄구멍 25개에 맞춰 새 연탄 두 장을 얹었다.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연탄불을 보는 해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약해진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면 인생이 아니겠지만 마음을 먹지 않으면 오늘을 살기 힘들다. 인쟁기를 지고 밭고랑을 내는 방법은 발 앞과 밭 끝을 동시에 보는 눈이다. 발 앞만 보면 앞으로 나가기가 어렵고, 밭 끝만 보고 나가면 옆에 밭고랑을 놓쳐 고랑은 삐딱삐딱 불규칙한 간격을 만든다. 인쟁기를 처음 지는 날, 아버지는 뒤에서 쟁기를 잡고 ‘앞으로’, ‘옆으로’, ‘천천히’, 내비게이션같이 말했다. 내비게이션 없는 연애의 인쟁기를 처음 걸머지고 가는 길은 서툴고 이별은 더 서툴다.
집 같은 집에서 하룻밤 자고 싶었다. 호텔방에 동그란 침대가 놓였다. 새벽기도를 나가는 사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침대 끝에 걸터앉은 해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별하는 방법을 몰라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다. 무릎이 눈물로 일렁였다. 담백하고 덤덤한 사람은 아니었다. 해나도 눈물을 닦으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행거가 없었지만 책임지지 못할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해나는 잠옷을 곱게 접어 자기 가방에 넣었다. 기차역에서 정동진행 기차표를 끊었다. 파도가 하얗게 밀려오는 플랫폼 벤치에 다시 앉았다. 어린 시절 강변을 걷고 산길을 걸어 집으로 오면 옷에 도깨비풀이 잔뜩 붙어 있었다. 사랑은 떼어내고 또 떼어내도 혼자서는 다 떼어내지 못하는 도깨비풀 같다. 끊어진 자리에서 이어지는 철길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 pp.62~63
‘그래. 어때? 눈 없는 눈으로 보는 세상이?’
‘넌 누구니?’
‘나, 마음의 소리. 넌 두렵지 않니?’
‘머가? 이제 밝은 세상을 볼 건데?’
‘눈 없는 눈으로 보는 시선들 말이야.’
‘내가 타인의 시선이 두려운 사람 같아?’
‘넌 아직 시각장애인의 고달픈 생활을 몰라.’
‘장애를 몰라도 하나도 두렵지 않아. 도지 붙이는 농사꾼, 정부미를 지고 삼각지로 걸어가던 사람이야.’
‘하하. 그러신가. 바닥 인생은 산전수전, 공중전이라지만 장애는 우주전이야. 너 부모님에게 장애인 등록한 거 말도 못 했잖아.’
‘그건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은 거뿐이야. 내가 유일하게 지켜야 할 사람들이거든.’
‘사람들이 장애인을 불가촉천민처럼 피해 가도 진짜 괜찮아?’
‘난 괜찮아. 우주의 먼지같이 살아도. 어차피 외로운 인생이잖아. 난 눈먼 새처럼 날개를 펴고 비상할 거야. 왜 더 할 말 없어? 저 불빛 우리 엄마같이 예쁘다.’
30분, 수술이 끝났다. 회복실에서 잠들었다. 안대를 벗고 0.2 시력을 되찾았다. 차번호가 선명했다. 색채의 길을 걸어 신학교로 돌아왔다. 본관 앞 회백색 바위에 새긴 영신대 표어 ‘신학과 목회’ 다섯 글자를 마음판에 새겼다. 여전히 눈 떨림 증상은 고칠 길이 없다. 글씨가 겨울 문풍지처럼 흔들리는 통에 30분 이상 독서확대경을 보기가 어려워 오디오북을 계속 이용했다.
--- pp.98~99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영주행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어두운 방에서 머릿속으로 설교를 준비했다. 아이들과 인사하고 고향집을 둘러봤다. 가을이면 감홍시가 툭툭 떨어지고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다. 그리움이 아픔을 안고 내려앉는 집이다. 집도 교회도 잃고 봉회리 117번지 기숙사로 돌아왔다. 작은누나는 부석사에 준서 유해를 안치했다. 8년 9개월의 짧은 생이다. 기숙사에 누워 형에게 말했다.
‘형아, 그때 형이 살고 내가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조카, 이쁘고 이쁜 아이, 지금 거기 있어? 난 조카마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땐 살기 싫더라. 차라리 대신 죽고 싶었어. 서울대병원 의사가 작은누나한테 그랬대. 남동생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형 병명도 이번에 알았어. 형이 남기고 간 몫까지 열심히 살고 싶은데 너무 힘이 들어. 여기서 더는 할 일이 없는 날, 우리 다시 만나자.’
--- p.115
날아가는 듯 달려 기숙사 문을 열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긴 복도를 좌우로 살펴도 그는 없다. 시간과 거리를 계산하면 출입문에서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거나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뛰어올라가도 그는 없다. 분명 계단 근처 네 개의 방 중에 하나다. 4동을 선택하고 첫 번째 방문을 두드리자 낯익은 신학생이 문을 연다. 갈색 신발장에 놓인 흰지팡이가 보인다. 동그란 선글라스를 쓴 그가 왼쪽 침대에 앉아 있다.
“안녕하세요? 신학과 우현준입니다. 시각장애인이신가 봐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도 시각장애인인데 도서관 앞에 서 있다가 기숙사로 들어가시는 걸 보고 뛰어왔어요.”
“시각장애인이시라면서요? 시력이 얼마나 되는데요?”
“0.2요.”
그는 벽에 몸을 기댄다.
“시각장애인 등록이 됩니까?”
“예, 재학생이세요?”
“옛날에 다니다가 말았는데 잠깐 왔어요. 도서관에서 저를 봤으면 시각장애인이 아니지.”
시력이 서서히 멀어가는 희귀질환 망막색소변성증, 천형 같은 진단을 받으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 선다. 장애인에게 가면 저쪽을 가리키고, 비장애인에게 가면 다시 저쪽을 가리킨다. 갈 곳 없는 박쥐처럼 외로운 자리에 오래 머물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떠나 어둠으로 조금씩 옮겨간다. 한 걸음 옮기면 두 걸음, 세 걸음의 아픔이 밀려온다. 나의 길이며 운명이다.
--- pp.154~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