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정과 개정의 과정에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담겨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대한민국 헌법과 현대사와 민주주의는 순탄하지 않았다. 헌정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한 권력자가 너무 많았다. 국민은 이들과 맞섰고, 그렇게 민주주의를 지켰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자신감과 그의 추종세력에 의해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행위자를 처벌한 사례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에 불과하다. 지금이라도 청산해야 할 역사이다. 지난날의 순탄하지 않았던 역사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치이다. 그 가치를 지키고 남기기 위해 많은 청년·학생이 피를 흘렸다. 민주주의는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의 투쟁과 죽음이 있었다. 그 투쟁과 죽음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우리 곁에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고 있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제5대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인 윤보선은 국민에게 인지도는 있었지만, 나이 많은 구정치인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제7대 야당 후보 김대중은 모든 면에서 박정희를 압도하였다. 첫째, 김대중은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명확한 공약을 제시하였다. 헌법개정을 통해 3선 연임 금지를 국민 발의로 제시하였다. 대중경제의 실현은 국민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대중경제란 복지확대, 경제성장의 과실에 대한 공정분배, 종업원 지주제, 농업개혁 그리고 부유층에 대한 과세 확대 등이다. 둘째, 해박한 지식에 선동력이 강한 연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김대중의 호소력은 국민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였다. 이러한 자신감에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TV와 라디오 공개토론을 제안하였다. 셋째, 무엇보다도 김대중의 나이가 박정희보다 젊었다. 김대중이 박정희보다 부족한 것은 관권 동원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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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또다시 헌정질서를 파괴하였다. 유신헌법으로 대통령 선거는 체육관(통일주체국민회의)으로 옮겨졌다. 체육관에서 치러진 제8대와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단독으로 출마하여 99.96%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국회는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이 탄생하였다. 무려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가 대통령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절대 권력이었다. 청년?학생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더욱 고조되었고 조직화 되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권을 남용하였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은 제멋대로 춤을 췄다. 유신체제는 반민주적이었고, 반인권적이었고, 반노동적이었고, 반통일적인 체제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자기 부하의 손에 의해서.
--- p.143
1980년 신학기 개학과 함께 대학생들의 민주화 열기는 드높았다. 5월 들어서면서 대학생의 시위는 학내민주화에서 ‘비상계엄 해제라’, ‘전두환 물러가’ 등 정치문제로 전환되었다. 민주화 열기로 군부의 영향력이 점점 배제되는 시국을 전두환과 신군부는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작성한 게 ‘시국수습방안’이라는 특단의 조치이다. 주요 내용은 첫째, 합법적인 국회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둘째, 군의 장악력을 최대한 강화하기 위해 계엄의 강도를 한 단계 높인다. 셋째, 실질적인 통치행위를 할 수 있는 기구를 설립한다. 신군부 ‘시국수습방안’의 첫째와 둘째는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그 목표를 달성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질적 통치기구 설립에 나섰다.
--- p.281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연희동 골목에서 기자들 앞에 섰다. 일명 ‘골목성명’이다. 그는 자신의 재임 중 과오와 비리에 대해 사과하고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사과문에는 “당시 국가적 비상시국하에서 아무런 준비와 경험도 없이 국정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고 밝혔다. 1980년 당시 “한국은 분명히 군의 영도력과 통제를 필요로 하고 있다”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던 자신감과는 대조적인 사과문이다. 1979년과 1980년 그 누구도 전두환에게 국정을 책임져 주라고 하지 않았다. 국정을 운영할 준비와 경험이 없었지만, 권력에 눈이 어두워 권력을 찬탈하였다.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 p.304
제6공화국 헌법은 〈전문〉을 비롯하여 〈본문〉 10장 130조, 부칙 6조로 구성되었다. 헌법의 구성을 보면 제5공화국에서는 제3장이 ‘정부’이고 제4장이 ‘국회’였다. 이를 제6공화국에서는 제3장에 ‘국회’, 제4장을 ‘정부’로 바꾸었다. 국민의 대표기구인 ‘국회’를 존중하겠다는 의미이다. 국회 또는 의회라고 하지만, 현행 헌법 제40조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명시하였다. 의회란 표현보다 국회라고 표현하고 명기하는 게 옳을 것이다. 입법권이 국회에 속한다는 말은 행정권은 정부에 그리고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삼권분립이다.
--- p.362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과도적 통일체제로 ‘남북연합Korea Commonwealth’을 제시하였다. 남북연합은 국가연합confederation이나 연방federation과 달리, 통일을 지향하는 과도적이고 특수한 형태의 결합이다. 즉, 1민족 내부의 2체제 연합 형태로 남북연합 안에서 남북의 개방과 교류협력을 실현하고 민족사회의 동질화와 통합의 기반을 다져나가자는 것이다. 이는 통일의 전제조건으로써 민족의 동질성 확보를 통한 점진적이고 단계적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방안이다.
--- p.376
‘국민의 신임 배반’은 법률적인 해석보다는 민심의 소재를 핵심 지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드러내는 정치적 요구를 민주적 정당성이 약한 헌법재판소가 무시할 수는 없다. 헌법 자체가 국민의 기본권이면서 정치적 유산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중대성’이라는 탄핵의 결정 기준은 주권자인 국민의 정치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 p.433
대한민국 헌법과 민주주의는 순탄하지 않았다. 숱한 사연과 곡절로 점철되었고 이를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지금에 이르는 과정에는 수많은 사람의 투쟁과 죽음이 있었다. 그 투쟁과 죽음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우리 곁에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고 있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 p.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