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달라졌다. 달라져버렸다. 홍진은 어떤 남자를 원하게 되었다. 홍진은 그 남자의 죽음을 가지고 싶었다. 홍진은 자신이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그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자신이 그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다. 홍진은 오래전 병원에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던 그때와 완전히 다르고 하루 종일 부엌에서 밥을 짓고 스님들의 하루 세끼를 챙기던 때와도 달라졌다. 무엇이 더 좋은 건지는 알 수 없으나 홍진은 분명하고 또렷한 정신으로 그를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자기 손으로 죽일 것이고, 시체를 갈가리 찢어버릴 것이다.
--- p.17
똥물 같은 가소로운 곳들보다 홍진은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머무는 곳이라는 축생도와 아귀도에 더 마음이 끌렸다. 아귀도에서는 영원히 배고픔에 시달리고 축생도에서는 동물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죄가 작다면 하루살이 같은 벌레로 태어난다. 왜냐면 금방 죽기 때문에 그만큼 고통이 짧아지는 것이다. 죄가 크다면 황소나 말처럼 오래 사는 짐승으로 태어나 고통도 길다. 죄로 인해 몸이 조각난 채로 죽으면 그 축생도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짐승으로 윤회한다…….
--- p.31
“어떻게 네가 경찰보다 더 잘 아냐. 야, 서화인. 네가 말해봐. 사람 죽이는 게 그렇게 쉽냐?”
화인이 대답했다.
“그럼. 빈 주사기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게 사람이야.”
오오, 그래? 한번 해봐? 동창들이 다시 낄낄거렸다. 농담이 진담처럼 되는 것도, 진담이 농담처럼 되는 것도 모두 순식간이었다.
--- p.47
이지하의 차는 홍진의 앞을 스칠 듯 지나갔고 느낌뿐이지만 그가 자신을 다시 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게로 찾아와 이상한 소리를 해대던 저 아줌마가 일부러 성당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혹 자신의 뒤를 밟는 것이 아닌가, 저 여자 뭐지?
뭐긴. 널 죽일 사람이지.
--- p.56
“사람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예?”
멍청한 질문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약간의 희망, 즉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법에 대해 물어봤을 때 누구도 농담 삼아 그런 걸 물어보지는 않을 터이니 뭔가 절박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주는 것, 그래서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한 희박한 확률이었다.
--- p.63
“다른 사람들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나요?”
홍진은 정말로 답을 몰라서 그에게 물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해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
“그러니 잊어버리세요. 누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거, 그거 힘들어요.”
미워하는 것이 뭐가 힘든가. 단지 죽이지 못할까 봐, 농약을 먹이든, 차로 치든, 칼로 썰든 이지하를 죽이지 못할까 봐 그게 힘든 거지.
--- p.72
대부분의 흠집은 방석처럼 깔고 앉아 무시할 수 있지만 어떤 흠집은 반드시 나쁜 꿈을 꾸거나 불쾌한 숙취에 시달리지 않을 때라도 의식의 한구석에 늘 매달려 있다. 그래서 바람이 불거나 구름이 몰려들거나 때로는 햇볕만 따스해도 바르르 끓어올랐다. 그것은 아주 짧은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가 진범이었을까.
--- p.94
홍진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은 마약에 취해 그녀와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써는 칼을 그녀와 아이의 배에 찔러 넣었다. 홍진은 아이보다 조금 더 튼튼했기 때문에, 아니 더 질겼기 때문에 숨이 붙어 있었을 뿐이다. 홍진은 끝까지 남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홍진은 자신이 이지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구역질과 현기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그를 죽여야만 하는 건 그가 먼저 살인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소명을 죽였고, 소명이 홍진에게 그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 p.107
화인은 홍진이 간절하게 구하던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미친 척하고 얼마나 잔인한 방법들이 있는지 떠들고 싶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며, 지금은 포기를 했는지, 아니면 마침내 방법을 찾은 것인지도 궁금했다. 무엇보다 그냥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혼자 침대에 누워 떠올릴 생각들이 불길했다.
“그럼 같이 먹읍시다, 이 고기.”
--- pp.128~129
죽을 만큼 지치고 피곤했다. 온몸이 땀에 젖고 덜덜 떨리고 여기저기가 아팠다. 그러나 해냈다. 이지하를 끌고 자신의 집, 아니 자신의 처형장까지 왔다. 어떤 운명이 드디어 실행되었다. 홍진은 손전등을 챙겨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지하실의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 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이지하와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 p.157
“영화를 봤어요.”
“어떤 영화?”
“이것저것. 많이. 거기서는 사람이 참 쉽게 죽던데.”
“그건 영화니까.”
“영화처럼 되면 참 좋을 텐데.”
화인은 웃었다. 마흔이 훨씬 넘은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너무 천진했지만 홍진은 정말로 진지했다. 그 진지함과 깊이 팬 주름과 어린애 같은 말이 뒤죽박죽이 되어 화인을 웃게 만들었다.
--- pp.170~171
홍진은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 작은 몸으로 매질을 당할 때 홍진은 대신 맞아주지 못했다. 겁에 질려 우는 그 애를 붙잡고 나도 무섭다고, 그렇지만 괜찮다고 말해주지 못했다. 홍진은 언제나 아이를 힘들어했고, 낳은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종종 아이가 사라져주길 바랐다. 불가항력적이며 자신의 잘못은 아닌 어떤 것에 의해.
의사의 말대로, 또 변호사의 말대로 그 모든 것이 홍진의 잘못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홍진은 남편을 죽였어야 했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남편이라는 자의 몸에 칼을 꽂았어야 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칼도 더 잘 썼으니 훨씬 쉬웠을 것이다.
--- p.208
어렸을 적에 TV에서 영화를 보면 악당들은 언제나 당장 죽여도 될 주인공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며 허세를 부리다 죽일 순간을 놓치고 오히려 자신이 죽고 말았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홍진은 늘 생각했다. 입 닥치고 그냥 바로 쏴야지. 어쩌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홍진이 아니고 이지하일지 모른다. 홍진은 타이밍을 놓치고 주인공을 살려주게 되는 악역인지도.
절대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고, 자신이 악역이라면 이렇게 무능할 리가 없다. 철저하게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처음보다 훨씬 발전했다고 홍진은 생각했다.
--- pp.246~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