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낡고 닳은 책의 맨 앞 장을 모두 밝혀냈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여기는 이란의 모 대학 고고학 연구실. 연구원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몇 달을 끙끙댄 끝이었다. 1300년 이상 흙 속에 파묻혀 있은 탓에 책 속지는 거의 바스러져 있었고, 맨 앞 장만 겨우 글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고대어로 쓰인 데다 그나마 남은 글자도 희미한 게 더 많았다. 읽어 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던 작업이었다. 그래도 이 앞 장만 해독하면 최소한 누가 무엇을 기록한 책인지는 알 수 잇을 터였다. 연구원들은 밤낮없이 낡은 책에 매달렸다. 오늘, 그것이 모두 밝혀진 것이다.
동료들은 서로 끌어나고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애를 먹이다 가장 나중에, 지금 막 밝혀진 ‘신라’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프롤로그, 운명의 유리병, 본문 13~14쪽
프라랑이 왕의 자리 근처에 깔려 있는 정교한 무늬의 서역 모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아찬 어른, 이 유리병이 저 모전을 만든 나라에서 만든 거라면서요?”
“예, 페르시아라는 나라랍니다, 공주님. 예전에는 주로 비단길을 거쳐 장안으로 온 것을 장안 상인이나 우리 상인들이 신라로 들여왔는데, 요즘은 개운포로 직접 가지고 들어오는 서역 상이ㅣㄴ들도 가끔 있습니다. 이 유리병은 이번에 들어온 서역 사인에게 산 것입니다.
왕후가 손으로 모전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이 모전이 더 신기합니다. 색색의 가느다란 실로 이렇게 섬세학고 고운 무늬를 넣어 짰다는게 도무지…… 얼마나 귀신 같은 솜씨를 가진 사람들이기에 이런 걸 만들까?” ?-손님, 본문 21~22쪽
이제 갓 화랑에 들어간 무천은 챙, 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검무에 넋을 잃었다. 무희들이 칼을 높이 들어 허공을 가르자 칼날에 반짝 하고 햇살이 부서졌다. 무천이 박수를 치면서 프라랑을 돌아보았다.
“공주님, 나는 검무가 제일 좋아요.”
“그러니? 나는 북춤이 좋은데.”
“이다음이 북춤이에요. 저기 저쪽에 작은 불을 든 무희들이 준비하고 있어요.”
북춤에 이어 꽃을 뿌리는 산화무 등 다양한 춤들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새로운 음악이 연주되었다. 박수와 감탄이 이어지고 프라랑도 무희들의 아름다운 손동작, 발동작에 눈을 떼지 못했다. ?-신녀, 본문 38~39쪽
운명. 프라랑은 아비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비틴의 얼굴에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깊은 눈과 커다란 코, 이렇게 생김새도 말도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과 함께 시를 읊고 있다니 참으로 묘한 일이긴 했다.
‘이 사람은 왜 이리로 온 것일까? 아니, 잠시드라는 조상은 왜 이 사람을 신라로 보낸 것일까?’
아비틴이 입을 꾹 다문 채 프라랑의 시선을 가만히 받았다. 그의 눈이 강처럼 맑고 깊었다. 잠시 주변이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다. ?-서라벌의 달, 본문 74~75쪽
“공주야, 우리는 아찬에게 왕가의 혈통을 보태 줄 수가 없다.”
왕이 프라랑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깊은 눈빛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프라랑은 그 모두를 알고도 남았다. 왕은 귀족들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왕권을 강하게 세우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힘을 단단하게 하여 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다. 프라랑은 왕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님, 저는 신라의 공주입니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아버님의 고민을 압니다.”
“고맙구나.”
왕후가 프라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언, 본문 122쪽
포석정에서 열린 축하연에는 신라 춤, 음악과 함께 페르시아 악기 바르바트 연주와 노래가 곁들여졌다. 특별히 준비된 페르시아 군사들의 무술 시범은 하객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마당 한쪽에 거북 모양으로 물길을 판 곳에 술잔을 띄우면서 혼인 잔치의 흥겨움이 더 커졌다. 주령구 던지기에서 아비틴은 연거푸 술 마시기 아니면 노래 하기에 걸렸다. 그럴 때마다 아비틴이 워낙 흥겹게 노래하고 춤을 추어서 사람들도 연신 어깨춤을 추었다. 아비틴은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문천교에서 공주님을 처음 만났고, 마음을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원효 대사 다음으로 행운의 남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효 대사처럼 공주님을 혼자 남겨 두고 돌아다니지는 않겠습니다. 늘 함께 있겠습니다.”
“하하하, 원효 대사께서 울고 가시겠네.”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폴로경기, 본문 176~177쪽
파도가 좀 약해지는 듯하자 다들 지겨움에 지쳐 밖으로 나갔다. 위태위태하게 중심을 잡고 나가니 파도가 다시 요동을 쳤다.
“앗! 저기 보세요.”
월이가 소리쳤다. 금방 지나온 바다에서 파도가 솟구쳤다가 스러졌다.
“뭔데 그래?”
“이상한 거 못 봤어요? 조금 전에……. 앗, 또!”
뭔가 커다란 게 솟았다가 파도 속에 함께 파묻혔다. 물고기 꼬리 모양인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잠깐이지만 분명 푸른빛이 번득였다. 프라랑이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용……이구나.”
“그, 그렇죠? 용 꼬리죠?”
월이가 흥분하자 아비틴과 파라가 뭐라도 볼 듯 뱃전으로 몸을 내밀었다. 바다는 작은 파도를 연거푸 만들어 냈다. 다들 눈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용의 꼬리는 보이지 않았다. ?안녕, 서라벌, 본문 195~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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